불멸의 화가 반 고흐 - 고통 속에서도 별처럼 빛난 삶과 작품
이종호 지음 / 북카라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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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빈센트 반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후기인상주의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놀림, 그리고 왜곡된 형태는 현대 미술에서의 표현주의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반 고흐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 경매에서 기록적인 금액으로 팔렸으며 블록버스터급 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부분적으로 그의 광범위한 출판된 편지들 때문에, 반 고흐는 또한 전형적인 고통을 겪은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상상력으로 신화화되었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6쪽


고흐가 화가 시절을 짧게 보냈음에도 세계인에게 작품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오로지 고흐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사망한 후에야 진가를 인정받았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7쪽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쯤 들어본 그 이름 반 고흐!

TV나 매체를 통해 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는 반 고흐의 작품은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 고흐의 방, 별이 빛나는 밤' 정도이며, 그의 전체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반 고흐' 그는 누구이길래,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토록 사람들이 열광하고 기억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제서야 '반 고흐'를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생겼네요. ​

<불멸의 화가 반 고흐>를 통해 천재 화가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며, 그가 최고의 화가가 되기까지의 인생을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 테오도로스 반 고흐 부부의 여섯 자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66년 열세 살에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진학하여 어릴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주와 관심이 있었기에 미술 과목을 배우게 됩니다.

다만, 본인만의 화풍이 뚜렷한 고흐는 화가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근법을 배우지 못하게 되며, 이로 인해 훗날 초기의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을 가족과 입상 경력이 있는 화가 친구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소개를 하지만 그 친구로부터 원근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그렸다는 핀잔을 듣게 됩니다.



1868년 고흐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집안 내력인 정신 병력이 고흐에게 발병이 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1873년 헤이그에서 구필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큰아버지 센트에게 보내어 미술상을 공부하게 합니다. 반 고흐는 구필 화랑 파리지점, 동생 테오는 구필 화랑 브뤼셀 지점에서 근무를 하게 되죠.

하지만 고흐는 그 만의 화풍이 뚜렷했기에 다른 화가들의 화풍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급기야 화랑 고객에게 다른 화가의 그림에 대한 혹평을 하고, 구필 화랑이 재주 있고 전망 있는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지 않고 그림을 팔아 이득만 취하려고 한다고 논쟁을 하여 결국 그는 해고되고 맙니다.


고흐가 살던 시대에도 화가가 되려면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흐는 기초부터 배우겠다는 마음보다는 하루빨리 장남으로써 가족에게 인정을 받는 것과 동생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커서 독학으로 실력을 쌓겠다고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림 기술은 간단하게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초 교육을 받지 못한 고흐는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자 동생 테오가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고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고흐는 비로소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과연 그림을 시작해야 할지 혹은 단념해야 할지 의논하기 위해 다시 한번 마우베를 찾아가야 하겠다. 일단 화가가

되기로 결정한다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와 나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30쪽


화가였던 안톤 루돌프 마우베는 고흐의 그림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으며, 화가로 소질이 있으니 더 많은 그림을 스케치하라고 조언을 하고, 고흐를 화실로 불러 정물화를 그려보라고 했는데, 고흐는 난생처음 팔레트를 손에 들고 화가 옆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1883년 9월 미술 평론가들은 이즈음 고흐가 유화를 그리기는 하였으나, 작품의 기법을 볼 때 아직 고흐가 색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미숙하다고 평했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자신이 그림 그리는 재주는 있지만 다른 화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그가 그림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자 결국 부모의 집이 있는 뉘넌으로 향했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고흐는 다양한 색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위선적인 그림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원했던 고흐는 그가 32세(1885년)에 회화사의 물꼬를 튼 결정적인 계기가 된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게 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41쪽


1885년 3월 고흐가 화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파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파리에서 살고 있는 동생 테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테오는 고흐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프랑스 회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상주의 화가를 고흐에게 소개해 주어 매우 중요한 경험을 쌓게 합니다.


1888년 2월 고흐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의 아를로 이주합니다. 이곳에서 고흐는 하루 종일 이젤을 들고 시골을 걸어 다니며 그림의 주제를 찾아 그림을 그렸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 풍경과 농부의 모습을 그리기 원했던 고흐이기에 아를은 고흐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아를에서 고흐는 그 유명한 <밤의 카페 테라스>와 아를의 간판으로 알려진 <아를의 랑글루아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을 남기게 됩니다.




프랑스 아를에서 그린 그림들은 네덜란드에서 그린 그림 보다 밝은 색채와 구조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파리 작가의 이야기>와 <몽마르트르 언덕> 두 점을 앙데팡당 살롱전에 출품합니다.

자신감을 얻은 고흐는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화가들에게 제안을 하지만, 폴 고갱만이 제안에 응합니다. 이마저도 동생 테오가 고흐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을 후한 가격으로 구입하겠다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도 다르고 그림에 대한 관점 자체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고흐의 걸작인 해바라기 시리즈가 그려진 시기이기 때문이죠.

위 좌 : 세 송이 해바라기 / 위 우 : 열두 송이 해바라기 / 

아래 : 열네 송이 해바라기


폴 고갱과 마찰을 빚은 반 고흐는 면도 칼로 자신의 귀를 자르는 등 정신병 증상이 심해지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치료를 받고 증상이 좋아지자 의사는 고흐가 집에서 그림을 그려도 좋다고 허락을 합니다. 그러나 아를 주민들은 고흐를 병원에 계속 입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생레미 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그린 <붓꽃>이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생레미에서 머무는 1년간 그의 후기 걸작으로 일컫는 화려한 작품들을 그려냅니다.

<붓꽃>과 더불어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 나무가 보이는 밀밭> 등이 있죠.


정신병원에서 그린 많은 그림을 테오에게 보내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의 작품을 본 평론가들은 그가 폴 고갱과 동일한 위치에 올랐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는데도 완벽을 추구하는 그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신이 그림을 배우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는 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1890년 5월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퇴원한 고흐는 파리에서 가까운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거처를 옮겨갑니다.

이곳은 밀밭과 자연 풍광이 일품이라 화가들이 선호하는 지역인데, 이곳에서 고흐는 그림 스타일도 수정하고, 따뜻한 색조에서 차갑고 신선한 색조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의 붓놀림은 표현력이 풍부해졌으며, 그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1890년 7월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사건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사망 증명서에는 그가 자살로 사망했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사람이 쏜 총에 맞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흐를 치료하던 가셰 박사의 딸 마르게리트에게 실연을 당한 충격과 배신감으로 자살을 했다는 가설과 고흐와 함께 술을 자주 마시던 소년들이 고흐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고흐와 대립이 생기자 우발적으로 총을 쏴 치명상을 입혔을 가설입니다.

어느 가설이 맞든 고흐의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성공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그 자신이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이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하며 현실을 부정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남들과 다른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만 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그 신념 때문에 현재 이렇게 유명한 화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서 작성한 글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단다

It's not too 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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