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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임영태 지음 / 마음서재 / 2017년 10월
평점 :
신에게 기도했다. 지금 아무 일도 없다면 앞으로 다른 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고.
이 책은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살아가는 일'에 대한 3번째 공간에서의 이야기이다.
인구 오천명의 작은 읍내.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집과 마주한 편의점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시급 육천오백원, 하루 10시간 일한다. 벌써 이십 개월이다. 밤 열시부터 아침 여덟시까지가 주인공의 시간이다. 하루 30분은 출퇴근으로 횡단보도 어디쯤 지날 것이고, 13시간 남짓은 연탄을 갈고 쓰레기를 버리고 잠을 자거나 은행업무를 할 지도 모르겠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내년이 환갑이다. 아내도 편의점에서 일한다. 시급 오천칠백원에 오후 세시부터 열한시까지. 사실 한 달에 몇번 빼고는 아내와 얘기할 '시간'이 거의 없다. 평일에 나와 아내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일상에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기계적이다. 출근해서 시재계산하고 교대하고 점검하고 청소하고 정리한다. 주인공에게 계절과 날씨는 편의점 상품의 흐름으로 인식된다. 겨울이 다가왔음은 호빵이, 여름엔 아이스크림, 비오는 날은 우산이, 휴가철에는 세면도구의 판매로 알 수 있다. 손님도 편의점의 상품으로 연상할 수 있다. 출근 시간대의 고정 고객부터 야간의 불특정 고객까지.
주인공은 돈버는 일이 서툴다. 돈을 벌어보려고 애쓴 적도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 물정에 어둡다. 그래서 가난하다. 하지만 아내는 불평불만 없이 주인공을 믿고 따라와 준다. 이런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아플까 치매라도 있을까 걱정하지만 늘 제자리 걸음이다.
편의점은 다양한 사람들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중간지이다. 화물차 기사, 청년, 젊은 남녀, 인출기 손님, 지업사 사장, 인력사무소 남자, 여고생들...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아무도 자신을 얘기하지 않는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의 끈을 잇기가 두려운 것일까? 아님 고독에 익숙한 것일까?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편의점 이외에서 주인공의 삶의 궤적과 회상 인물을 따라가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은대극장, 안심리, 여인숙, 사당동, 노래방, 111동, 약수터, Y시, 장례식장, 원두막, 하루, 번개시장...
수퍼주인, 부동산업자, 아버지, 동생, 동창생, 정우형, 동규, 조금시인, D씨, E여사...
편의점이 3인칭 외적 관찰의 공간이라면, 편의점 외의 공간은 주인공의 내면 성찰의 기억들이다. 아름답거나 어색하거나 불편하거나 아프거나...지금 주인공은 편의점이라는 우주선 캡슐에서 반복적인 일상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졌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그냥...
임영태 작가는 문학적 재능이 탁월하다. 이 작품은 '담백하게 빠져든다.' 꾸밈이 없고 치장하지 않는다. 간결하고 호흡이 짧다. 경험에서 우러난 사실적 묘사도 뛰어나다. 덕분에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과 시공간을 함께 여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7년만의 작품을 단숨에 읽어버려 작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1편 '비디오를 보는 남자'와 2편 '아홉 번째집 두 번째 대문'도 읽어볼 생각이다.
※ 의도된 Easter Egg, 책표지 제목의 반짝이는 은박 자모를 합쳐보면 '고독'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