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향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독자들은 책 표지만으로 여러 단서를 얻게 된다.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적어도 나는 이 소식을 계기로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의 장편소설 《클라라와 태양》의 겉표지를 벗겨 보면 영문판 원서로 짐작되는 하드커버 표지가 나오는데, 영문 원제 'KLARA AND THE SUN' 보다 1.5배 정도 더 큰 'KAZUO ISHIGURO'라는 이름이 주목을 끈다. 이 책의 영국권 출간을 담당한 출판사 Faber & Faber (파베르?) 웹사이트에서 다른 표지들을 더 구경해 본 결과, 《클라라와 태양》의 영문판 표지에는 다분히 노림수가 있어 보인다(가즈오 이시구로는 영국 작가다).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력을 아는 독자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한 번씩 책을 들춰 보길 바라는 만든 이들의 마음이 느껴져 재미있다. 커다란 이름 아래에는 이 문구가 작게 덧붙여져 있다. "WINNER OF THE NOVEL PRIZE IN LITERATURE"

가즈오 이시구로의 기존 출간작 중 《나를 보내지 마》를 3년 전쯤 읽었는데(노벨상 수상 이후) 당시에 적어 둔 리뷰를 다시 읽어 보니 화가 가득하다. 그래도 두 권째 읽으니 작가의 스타일이 어느 정도 보인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와 이곳을 떠받치는 종속적 존재인 주인공, 한꺼풀씩 아주 은근하게 내보이는 복잡다단한 세계관. 이렇게 모아 본 특성은 《클라라와 태양》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 책은 번역도 무척 재미있었다. 웹사이트 가입을 할 때면, 무분별한 매크로 앱 접근을 방지할 목적으로 "□로봇이 아닙니다"라는 팝업창이 틀 때가 있고, 이 체크박스를 클릭하면 로봇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련의 절차가 이어지는데, 《클라라와 태양》을 펼쳐 몇 장 읽다 보면, 이와 반대로 내가 "□로봇이 맞습니다"라는 팝업창에 체크 표시를 하고 이 세계로 슬쩍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에이에프(Artificial Friend, 인공 친구)인 주인공 '클라라'의 시선으로 인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특수 장치를 찬 느낌이라고 할까.

만일 고도로 학습이 잘 된 엔진을 가동해 이 이야기를 요약하게 하면 어떤 말과 문장이 남을까? 인간의 섣부른 추측으로는 딱히 쓸모있는 의미값이 남을 것 같지는 않다. 뼈대를 이루는 플롯의 분량도 짧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뭐라 줄여 전할지 잘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이 소설을 소개하면서 줄거리를 늘어 놓자면, 나부터도 조금 맥이 빠진다. 그래서 자꾸 작품 바깥에 놓인 사적인 감상이나 신변 잡기를 줄줄 읊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적절하지 않은 비유는 안 하느니만 못 하다는 걸 잘 알지만, 어쭙잖은 비유도 하나 던져 본다. 《클라라와 태양》을 설명하는 건, 태양볕에 죄 말라 소금기만 남은 자리를 두고 바다를 말하는 느낌이다. 열심히 말을 골라 보지만 그 안에 바다를 모르는 사람에게 바다를 전할 말 같은 건 들어 있지 않다. 하지만 이미 바다를 아는 이라면 내 빈약한 말주변만으로도 금세 머릿속에 바다가 차오르고, 또 클라라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첫 장에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열고 독자를 맞이하는 클라라와 마주한다. 그리고 내심 눈치챈다. 이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그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서글픈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또, 그 길의 끝에서 그가 어떤 모습일지를. 클라라는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닮았다. 〈토이스토리〉의 장난감 친구들처럼, 《오늘의 네코무라씨》의 네코무라처럼. 인간인 내가 인간에 의해 소모되는 존재인 에이에프를 두고 슬픔을 느낀다는 점이 다소 이율배반적이지만, 이 세계 속 인간들이 그러하듯, 이 세계 바깥의 인간들 역시 모순덩어리라는 핑계를 대 본다.

클라라를 집으로 데려 온 인간 '조시'의 삶은 당분간 계속된다. 그리고 계속되는 여정과 대비되는 회자정리식 장치처럼 클라라는 조시의 소단원을 위한 보이지 않는 공그르기 매듭이 된다. 계속되어야 하므로 끝일 수밖에 없는 어떤 존재와 사건이 있다. 내 존재 역시 누군가에게는 매듭이었고, 내게도 삶 속 매듭이 되어준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진 누군가의 바다를 알기 때문에, 한 점 소금처럼 조시의 흔적으로만 남은 클라라가 서글퍼서 조금 울었다. 특히 "네가 거기 있는 동안 그 아이는 외로운 게 뭔지도 몰랐을 거야." 하는 말이 무척 슬퍼서, '네 외로움은 대신 내가 알게.' 같은 우스운 말을 혼자 건네기도 했다. 내가 클라라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된 게 처음부터 독자로서 온전한 내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작가의 치밀한 의도에 따른 흔한 독서 전개였을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책장을 끝까지 다 넘겼다가 돌아오면, 양끝 속지에 인쇄된, 클라라가 보았을 창문 프레임 너머 하늘과 태양의 모습도 진득한 여운을 남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작품을 더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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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4 2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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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1 1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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