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키에서 출판사 서평 이벤트에 참여해 좋은 책을 얻어(?) 읽은 기억 때문에 이번에는 한 권이라도 사서 보자 싶어서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부키 출간 목록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이 책 《누구나 일하고 싶은 농장을 만듭니다》를 발견했다. 제법 수익성 있는(???) 경제경영서를 주력으로 출간하는 출판사에서 이런 책도 나온다니, 고유의 출판 철학을 가진 좋은 회사인 것 같다는 생각을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해보았다.

영국에서 잠시 체류할 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 도시의 풍경이란 어딜 가든 휠체어나 유아차를 타고/끌고 가는 이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는 거였다. 또, 지하철은 몰라도, 버스를 타기에는 한국보다 휠체어/유아차 이용자에게 한결 수월한 환경이다. 출입구에 계단이 없고 바닥이 낮은 버스를 우리는 '저상버스'라고 부르지만 거기서는 모든 버스가 그렇게 생겼다. 이런 환경이 특정 인물에게만 유용한 "배려" 혹은 "추가 비용"이라는 생각 자체를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이런 버스는 비단 이런 휠체어/유아차 이용자 외에도 무거운 캐리어를 든 여행자에게 유용하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수월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 상태가 일시적이든 만성적이든) 무척 유용하다. 시설을 이용하는 데 가장 불편함을 느낄 이들에 맞춰 설비와 관련 서비스를 설계하면 이는 보통 모든 이에게 유용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을 "누가" 이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의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 구성원을 보편적으로 정의해보는 시간을 가진다. 아마 우리나라 버스를 만들 때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이용자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는 휠체어나 유아차 이용자가 잘 보이지 않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이들은 점점 더 "버스를 탈 만한 사람"의 범주에서 멀어져 다른 대안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이왕 영국 추억팔이를 한 김에, 다른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한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생각보다 영자막 서비스를 이용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한국어자막 서비스를 제공하는 콘텐츠가 손에 꼽듯이. 운좋게 해나 개즈비의 〈더글라스〉 영국 투어 기간이 내 체류 기간과 겹쳐 공연장을 찾았을 때도 공연자의 말을 일부만 겨우 알아들어 불편함이 많았다. 아마 영자막 서비스가 있었다면 한결 나았을 거다. 이후에 추가로 프롬프터 자막을 제공하는 공연이 하루 더 편성된 걸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는데 그 '프롬프터'라는 게 예전 '가요톱텐' 시절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보던 조그마한 브라운관 화면처럼 작아서 앞자리 몇 줄에 앉은 사람들에게만 겨우 글씨가 읽히는 그런 프롬프터임을 알고 잔뜩 실망한 기억이 난다. 이후 이 공연은 넷플릭스에 올라온 버전을 보고야 맞추다 만 퍼즐 조각을 겨우 끼워 맞췄다. 그런데 만일 내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태였다면 어땠을까?

콘텐츠를 좋아하게 될수록 이를 소비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감각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무조건 꼭 같은 삶을 누려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장애라는 건 어떤 부문에서 신체/정신적 한계 혹은 보편적이지 않은 특이성을 지님을 의미하고, 인간이 가진 기술력으로 보완하기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장애인의 일상이 비장애인의 일상과 얼추 비슷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게 지구에 아직 존재한 적 없는 초월적 기술이 아니라, 약간의 추가 작업과 거기에 드는 시간, 비용 정도라면 이런 걸 "추가"의 범주로 여기는 대신 "보편"의 기준으로 삼으면 더 많은 사람의 삶이 한결 윤택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편"의 정의를 넓혀가는 게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정의를 넓혀가는 일이자 인간 사회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일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에 '스페셜 올림픽'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출전하는 올림픽인데 유일하게 '올림픽'이란 명칭을 허가한 대회라고 한다. 일명 '디비저닝'이라는 과정으로 선수들을 분류하는데 이때 선수들의 기록보다는 수행능력을 우선순위 삼는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대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승이나 메달 획득이 아니라 대회에 참여하는 과정 자체라는 측면에서 어찌 보면 '스포츠 정신'이 가장 살아있는 대회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SBS 특별 캠페인 방송으로, 시청각 장애인들의 삶을 배운 것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보이지 않지만 들을 수는 있고, 들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는 시각 또는 청각 장애인에 비해 시청각 장애인은 시각과 청각 모두를 감지하지 못한다. 캄캄한 우주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감각의 입력이 시청각 이외의 것으로 편중되어 있는 삶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겠다. 아직까지 거의 가시화가 되지 못한 장애라고 한다.

이 방송을 본 이후로 넷플릭스에서 이따금 음성 해설을 듣는 습관이 생겼다. 해설은 넷플릭스의 인트로, 두둥!하는 소리와 함께 나오는 N자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른 일을 하면서 〈킹덤〉을 틀어놓고 있을 때면 소리를 들으며 화면을 한번 상상해본다. 그러다 이따금 화면으로 내가 소리로 들은 내용이 화면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확인해보기도 한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이에게는 시각이 청각을, 청각이 시각을, 상호 보완하지만 날 때부터 한쪽 감각이 아주 미약하거나 아예 차단되어 있는 채로 살았다면 내가 화면이나 소리를 엇비슷하게라도 상상할 수 있었을지 자신이 없다. 내가 지금 나름의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는 영상 번역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고 책도 전혀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누구나 일하고 싶은 농장을 만듭니다》를 읽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대단한 통찰이나 발견처럼 늘어놓는 건 전부 내가 보고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 탓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선후천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하는, 혹은 보고 듣지 못하는 이들이 그저 나는 운이 나빴네 하고 넘기기에는 너무 큰 불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사회의 "보편"이 보고 들을 줄 아는 대상을 암묵적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을 기반한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면 우연히 더 많이 누리게 된 쪽에서 기울어진 평형의 보완책을 마련할 궁리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 역시 이러한 평형을 위한 보완재를 만들려는 노력을 소개하는, '푸르메소셜팜'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사례집이라 할 수 있다. 장애인과 농업이라는 큰 주제를 엮어, 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보다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면서도 효율도 놓치지 않는 사업 모델을 마련하는 과정은 현 시점에서는 어떤 결과물의 집약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절대 반지'를 꿈꾸며 떠나는 원정(?)의 시작에 가깝다. 그리고 《누구나 일하고 싶은 농장을 만듭니다》를 통해 이 이야기가 더 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진다면 이 모험 또한 훨씬 더 견딜 만하면서도 보람차고 풍성해질 것이다.

장애 청년이나 치매 노인 등 모든 농장 이용자가 농업의 치유 효과를 경험한다.

작물을 재배하고 동물을 키우면서 자연스레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

무엇보다 작뮬을 키우는 과정에서 발달 장애인이 돌봄을 받는 객체에서 돌봄을 주는 주체로 거듭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프롤로그 중, 농장 경영주이자 네덜란드 사회적 농업의 귄위자 얀 하싱크 교수의 말


오랜 역사 속에서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부모의 보호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화한다.

더 선하고 중요한 가치를 개닫고 더 좋은 사회, 더 살 만한 나라를 만들면서 약자를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경쟁하면서도 배려를 배우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한순간 내게도 닥칠 수 있는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으로 풍요를 넘어 풍성한 삶을 만들어 왔다. 물질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가치다.

우영농원 이사 장춘순의 에필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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