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번역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납품한 자막이 언제, 어디로 올라가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구조 때문에. 보통 운좋게 내가 납품한 자막이 어디에 올라가 있는지 알게 되면 해당 콘텐츠는 직접 사거나 플랫폼을 구독해야 최종 버전을 확인할 수 있다(사실 납품 이후에 굳이 내 자막의 행선지를 찾아다닐 이유도 딱히 없긴 하다). 이게 내 일일 때는 마냥 이상하다고만 느꼈는데, 막상 돌이켜보니 보통 내가 만든 건 남이 쓰게 되어 있다. 유통 구조라는 게 그렇다. 최고급 커피 열매를 수확 및 가공하는 노동자와 최고급 커피를 마시는 소비자는 대체로 분리되어 있다. 아보카도를 수확하는 사람과 품질 좋은 아보카도를 식재료로 소비하는 사람도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뭣보다, 최고급 피아노를 만드는 노동자와 그 최고급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가 사이의 거리를 따져보자면 한참이나 뚝 떨어져 있다. 둘은 어찌보자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 관계란 다분히 암묵적이다. 차라리 직접 납품한 자막을 찾아내기라도 할 수 있는 내 입장이 낫게 느껴질 지경이다.

우리 집에 피아노가 온 날은 어느 비오던 여름 날이었다. 당시에 나는 만원짜리 다마고치를 갖고 싶어 어른들을 졸라댔는데 심지어는 그즈음에 사기로 했던 피아노와 다마고치 중 택일을 하라던 극딜에도 망설임없이 다마고치를 택할 만큼 제법 질척거리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지금도 '다마고치'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왠지 가슴이 뛴다). 그 결과 나는 다마고치와 피아노, 모두 갖게 됐는데 살면서 손에 꼽는 성공적인 거래였다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만큼 나는 피아노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 입학식날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는 가풍 아닌 가풍이 있었는데, 엄마를 졸라서 학원에 가긴 했지만 막상 나는 연주에 딱히 재능이 없었다. 초등학생 때 원생 모두가 한 번쯤 나가던 피아노 콩쿨도 나는 전혀 경험이 없다. 그런데 왜 피아노와 만난 첫 날이 이렇게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지 나부터도 의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체르니 30을 간신히 떼고 피아노 학원을 그만 다니기로 정했다. 이후 중3 때였나 갑자기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동네 피아노 학원을 잠시 다닐 때도 피아노를 무진장 못쳤고, 성인이 된 후 첫 알바로 번 돈을 털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을 때도, 그 학원 선생님이 소개해준 선생님에게 개인 레슨을 받을 때도, 또 나중에 회사 다니며 재즈아카데미에 등록해 레슨을 받을 때도, 죽 한결같이 피아노를 향한 정체 모를 동경과 울렁증은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와 슬픔이처럼 붙어다녔다. 그러는 동안 피아노 자체에 묘한 정을 붙이게 된 것이 그나마의 수확이다.

누가 내게 피아노에 관해 묻는다면, '수학'에 관해 물을 때와 마찬가지로, 잘치진 못하지만 좋아한다고 답할 것이며 내게 피아노는 무척 가깝고도 각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스타인웨이 만들기》를 읽으면서 좀 놀랐다. 나 역시 "일반인은 관심을 가지기 쉽지 않은"이란 수식(옮긴이의 말 내용 중)의 그 '일반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멋진 피아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냥 우리 집에 있는 오래된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가 마음에 든다(이것도 사실 무지 비싸고 좋은 피아노다). 솔직히 좋은 연주자를 만나지 못한 이 피아노에 안쓰러움을 느낀 적이 더 많다. 레슨 선생님이 우리 집 피아노 소리가 좋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내가 별로 치지 않고 새 걸로 오래 방치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내가 고가의 스타인웨이를 소장할 가능성보다는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바닥부터 시작해 스타인웨이 제조 공장에 취직하는 게 스타인웨이와 가까워질 수 있는 좀 더 빠른 선택지일 확률이 더 높아보인다.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이들 중에서도 일부만 관심을 가질 만한 스타인웨이의 제작 공정을 다룬 책을, 더군다나 스타인웨이에 관심도 없는 내가 읽고 있으려니 흥미가 훌쩍 떨어졌다. 이 책은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내가 만든 것을 내가 쓰지 않는' 이 세계의 생산/유통 구조를 고민하는 이들이 더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근에 피아노 연습을 다시 시작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10년 전 레슨 선생님이 가르쳐준 귀중한 지식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피아노를 치고 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다니는 교회에서 레슨을 받았고(집에는 비밀로 했다) 이후 집에서 레슨을 받을 수 있게 된 첫 날, 우리 집 피아노 뚜껑(해머와 현이 자리한 쪽)을 열어본 게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 선생님이 소개해준 아주 멋있는 조율사분이 1시간 넘게 우리 집 피아노를 조율하던 기억도. 피아노를 만드는 사람도, 피아노 음을 조율하는 사람도, 피아노 연주를 잘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의미로 그들에게 이 악기는 단순한 기계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명시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같은 피아노라도 이를 만들고 음색 자체를 점검하는 사람과 이를 도구 삼아 연주하는 사람 사이에는 낚싯줄만큼이나 아주 가는 연결고리만이 남을 것이다. 나 역시도 우리 집 피아노가 묵은 먼지가 피어오르는 녹슨 소리를 내는 지경이 아닌 한 스타인웨이는 물론이고 그냥 업라이트 피아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그리 깊은 관심을 두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럴 생각 자체를 해보지 못한 것 같다.

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공학을 배우던 때에도, 피아노와 마찬가지로 컴퓨터 하드웨어에 별 관심이 없었다. 머리가 아프고, 그냥 알맹이(=소프트웨어)만 잘 돌아가면 그만 아닌가? 했었다. 그리고 딱 그와 비슷한 관점으로 당시에는 내 하드웨어(=신체)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때나 먹고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몸의 삐걱거림을 감지하고 내 몸과 내 정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되어 요즘은 운동도 챙겨 하고 식사도 전에 비하면 훨씬 신경 쓰게 되었다. 그 영향 탓인지 몰라도 요즘은 소프트웨어의 효율을 올리는 측면에서 하드웨어에도 슬슬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피아노에 관해서도 앞으로 소리와 연주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연습하다 보면 곧 물리적인 기계로서의 피아노가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도 궁금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이 책을 한 번 더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혹시 모르지. 주거 공간 문제 및 금전 문제를 잘 해결(???)해서 나중에 우리 집에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 야마하 전자 피아노 한 대에 이어 스타인웨이 한 대를 들여놓을 수 있게 될지도?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꾸준히 피아노 치는 일상을 이어나가야겠다. 전에 한창 재즈피아노 레슨 받을 때 하루에 30분만이라도 연습 시간 확보하라던 선생님 말씀은 좀처럼 실천이 안됐는데, 일상 전반에서 한결 안정을 찾은 지금은 의식하지 않아도 거의 매일 30분 전후로는 피아노를 치고 있다. 새해에는 구체적인 곡이나 목표를 정해 연습해볼 계획이다.

트위터 이벤트로 이 책 《스타인웨이 만들기》를 받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꽤 시간이 지났는데, 그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는 보은성(?) 리뷰라도 올리고 싶어 사진 먼저 찍어둔 게 벌써 10월이다(앞서 언급한 내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를 배경으로 찍었다). 알고 보니 내 책장에 이 책을 만든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 한 권, 같은 역자가 옮긴 다른 출판사의 책이 한 권 눈에 띄길래 함께 사진을 남겨보았다. 20대까지는 언젠가 읽겠지 하고 비상 식량처럼 사둔 음악 관련 책이 참 많았는데 실제로 끝까지 읽은 책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연말을 맞이한 겸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남은 책 2권을 비롯해, 내년 2021년에는 《음악의 기쁨》 전집도 꼭 완독하겠다는 다짐으로 리뷰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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