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사사롭고도 중요한 특징 두 가지를 앞서 밝혀둔다. 바로 여성 저자가 쓴 경제경영 저작이라는 점과 이 번역서에는 '그녀'가 없다는 점이다. 하나 더 꼽자면 여성 번역가의 작업물이라는 점도 부각하고 싶다.

최근에 출판 기획/편집 수업을 몇 차례 들었더니 책장을 펴기도 전부터 이 책의 방향성을 나름대로 살펴보고 분석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책의 제목이다. "후배 하나 잘 키웠을 뿐인데", 라는 구체적인 서술체로 된 제목은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선배로서의 시점을 제공한다. 그래서 나처럼 이렇다 할 후배가 떠오르지 않는 방구석 일꾼(?)도 "우선 하나 만들어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독서를 시작하게 만든다는 게 좀 재밌다. 당연하지만, 이 책은 선배든 후배든 그 사이 애매한 포지션에 자리한 나 같은 애매한 프리랜서들에게도 다각도로 적용할 수 있는 여러 유용한 통찰을 전한다.

저자 실비아 앤 휴렛은 《후배 하나 잘 키웠을 뿐인데The Sponsor Effect》를 통해 스폰서와 프로테제의 관계, 일명 '스폰서십'의 개념을 설파한다. 참고로 프로테제(protégé)는 프랑스어에서 기인한 단어로 풀어 설명하자면 '보호 받는 자'를 뜻한다. 이 책의 개념으로 상술하자면 상대적으로 경험이 더 풍부하고 좀 더 다양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의 스폰서에게 지도와 지지를 받는 위치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프로테제는 스폰서에게 로열티(충성심과 같은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그간 내가 개인적으로 한국 조직에서 요구 받아온 충성심에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쌍방향성이 결여된 느낌이라 굳이 외래어로 표기한다.물론 '로열티'라고 해서 뭐 또 그리 대단한 신세계의 이상과 신념이 있는 단어는 아니겠지마는)와 성과, 더 나아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 관계에 임하는 태도로 보답하게 된다.

이젠 살짝 좀 지난 유행이지만, 이 스폰서십을 멘토-멘티 관계에 빗대어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정적으로 요약하기보다는 각자 직접 책을 통해 배우는 방법을 추천한다. 이쪽이 훨씬 더 효율이 좋은 독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느낀 스폰서십의 인상이란, 사회 초년생 시절 잠시 그려본 찰나의 이상향에 가까운 관계다. 명확하게 공과 사를 구분하고 각자의 선을 잘 지키며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이끌어내는 그런 관계. 내가 직장 생활을 경험한 건 고작 3-4년 정도인데(파트 타임까지 따지자면 여기에 5년이 더해지니 깡그리 무시해도 좋을 데이터는 아닐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내가 겪은 90%정도의 선후배 관계는 괴롭기 짝이 없었지만 나머지 10%에 의지해 겨우 조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또, 운 좋게도 이 10%에서 나는 '스폰서십' 비슷한 관계를 경험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게 그런(?) 건 줄 전혀 몰랐지만.

이 스폰서십의 관계를 머릿속으로 정립해나가는 독서 초반에 떠오른 건 아무래도 정계 인사들 이를 테면 〈부통령이 필요해Veep〉 시리즈의 설리나 마이어와 에이미 브룩하이머 같은 관계였다(좋지 않은 예).



다행히도 중후반부터는 최근 방영된 MBC 〈다큐플렉스〉 8-9회 '은이네 회사'편으로 방영되기도 한 '컨텐츠랩 비보(VIVO)'이라는 좋은 예가 떠올라서 몰입도가 한층 올라갔다. 이 책이 선제시(?)하는 건 "후배 한번 잘 키워 봐" 같은 관점이지만 인간사가 다 그렇듯 이런 관계를 무 자르듯 선명하게 나누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내 경험과 위치를 나누고 베푸는 입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절실하게 타인에게 그러한 나눔과 응원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다만 이 복잡다단한 순환과 혼란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더욱이 자신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후임, 선임 구분할 것 없이 그 성취를 함께 도모할 상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고 그 과정에 전념해야 한다는 점이다.


"CEO는 자신의 방에 걸어 들어와

불편한 진실을 말할 용기를 지닌 이들을 선발해야 합니다.

그런 인재를 프로테제로 두어야 하죠.

제대로 된 프로테제를 고르면

많은 것을 또 배울 수 있습니다."

- 본문에 실린

글로벌 경영 컨설팅 회사, '부즈앨런 앤 해밀턴'의 CEO 호라시오 로잰스키의 말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도 좀 더 심화된(?) '혼자'의 상황을 겪기 전까지는 그냥 대부분의 일을 직접 맡아 하는 게 편했다. 나 혼자만 잘 하면 명쾌하게 성과로 이어지는 과정이란 단순해서 좋다. 타인이라는 변수가 사라지고 오롯이 나 혼자 모든 요소를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국에서 이렇다 할 사회적 관계망에 속하지 못하고 일종의 고립을 한번 겪고 보니 내가 그동안 '혼자'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 제대로 된 혼자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업계 안이든 밖에서든 알게 모르게 많은 이의 도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간에게 사회적 관계란 필수불가결한 삶의 요소에 가깝다. 《후배 하나 잘 키웠을 뿐인데》는 말하자면, 그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주변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다면 이를 일깨우고 또 감사하며 나 역시 의식적으로 그런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해보자는 제안을 담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의 백미는 후반부 12장, '#미투를 넘어서면 얻을 수 있는 것들#MeToo And the Third Rail'에 있다. 저자는 조직 내 권력 구조를 이용해 자행되는 성희롱/성추행/성폭행 등 특히 남성 고위직 인사들이 벌이는 권력 남오용과 그 결과로 모순적이게도 피해자들이 조직에서 배제되는 실태를 꼬집는다. 그러고는 건전하고도 생산적인 스폰서십을 위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데 특히 이 대목은 여러 기업에서 적극적으로 사내 교육 자료로 이용하며 본보기로 삼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스폰서십과 스폰서-프로테제라는 관계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던 불편한 감정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사례와 낯선 이름들이 끊임없이 나열되는 책을 읽을 때면 솔직히 좀 산만한 기분을 곧잘 느끼는데 중간중간 '실전 활용법' 코너를 통해 읽은 내용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어 좋았다. 또, 이 책 덕분에 묵혀두고 있던 리즈 와이즈먼의 《멀티플라이어》도 함께 읽었는데 실비아 앤 휴렛이 제안하는 이상적인 스폰서십 관계 형성과 유지 과정에 좀 더 구체적인 도움과 통찰을 곱할 수 있는(?) 워크북 성격의 책이다.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책의 제목처럼, 더하기 대신 곱하기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증폭하자는 취지의 저작이다. 0에는 어떤 숫자를 곱하든 0이 된다. 그러니 주변에 존재한 적 없는(0인) 아주 새로운 인재와 아주 새로운 역량을 찾아 헤매는 대신 이미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못한 역량을 찾아내는 '멀티플라이어'가 되어 조직 내에서 이를 배가시키는 조력자가 되자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책 모두 여성 저자가 썼고 여성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제 초반에 언급한 '시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본다. 함께 언급한 《멀티플라이어》 역시 긍정적인 개념을 제목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독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멀티플라이어로 생각토록 하고 그 반대의 부정적 개념인 '디미니셔'와 선긋기를 하도록 부추기는 측면이 좀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스폰서이면서 동시에 프로테제이고 또, 다른 잣대로 보자면 멀티플라이어이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디미니셔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너른 바다를 항해하는 셈 치고 좀 느긋하게 내 삶의 방향성과 중간 목적지들을 설정함에 있어 이 두 권의 책을 조타의 도구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바쁜 일상에 지친 독자들에게 이 책들이 전하는 말은 때로는 뻔하고 구태의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책들은 우리 모두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에 적용할 통찰을 담고 있다. 중요한 건 내 자신을 믿고, 0이라 착각해온 당신의 잠재 가치를 끈덕지게 발굴하고 이를 서로 곱하며 성장해나가는 '같이'의 가치다. 다가올 12월, 그리고 2021년 새해에는 우리 주변에서 나를 곱해주고 있던 스폰서와 멀티플라이어 들의 존재를 새로이 발견하고 또, 우리 자신 역시 누군가를 응원하고 곱해주며 상생하는 한 해를 보낼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네가 정말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디즈니에 자리가 생겼어. 완전히 신입 자리지만, 이 분야에서 진짜 일할 마음이 있다면 잡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리디아는 금융 업계에서 쌓은 경력을 버리고 그 제안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지금도 종종 그 얘기를 해요." 리디아가 말했다.
"부모님께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커밍아웃하는 것보다 은행 관리직을 그만두고 영화사에 신입 사원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설득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고요."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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