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버 노아의 《태어난 게 범죄》 출간 소식은 두 가지 지점에서 내겐 좀 의외였다. 하나는 트레버 노아의 국내 인지도에 관한 고민 때문이었고(물론 이 사람이 알아주는 코미디언이라는 것도 알고 그 유명세가 딱히 거품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한국 한정으로 소름끼치게 유명한 인사는 아니라는 거지) 나머지 하나는, 이 책이 책을 펴낸 출판사 '부키'의 그간 출간 목록과 살짝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이후 출판 기획 수업을 좀 들었는데 기획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교훈을 배웠다. 본래 개연성이란 만들고 엮기 나름인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창 출판 기획에 관심을 갖고 기획서나 검토서도 어설프게나마 써봤고(너무 단편적인 기획이라는 사유로 성사되지 못했다) 트레버 노아 같은 영미권 코미디언의 저작을 번역 출간하는 출판사 책덕의 '코믹릴리프' 시리즈에 추가될 애나 아카나 책이 요즘 슬슬 본격적인 제작 및 홍보 단계에 돌입한 탓에 이 책이 적어도 만날 사람(?)은 전부 속속들이 만나게 하려면 어떤 포장과 전략을 써야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태어난 게 범죄》를 읽고 어떤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애나 아카나 책은 내가 발굴한 건 아니라서 엉겁결에 (내가 자처한 셈이지만) 편집을 맡으면서 저자(그리고 번역자)와 친밀감을 쌓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마음처럼 잘 되지가 않았다. 이후 《태어난 게 범죄》를 다 읽고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애나 아카나보다는 아직(?) 트레버 노아와 더 친한 독자라는 사실을. 아니, 솔직히는 이렇게 한 번 더 정정하고 싶다. 나는 트레버 노아보다는 그를 낳고 기른 퍼트리샤 놈부이셀로 노아와 친해지고 싶은 독자라고.

나는 퍼트리샤와 (넓은 의미로) 구면이다. 그 존재를 나는 〈그 엄마에 그 아들〉이란 찰떡 같은 제목으로 넷플릭스에 소개된 트레버 노아의 스탠드업 〈Trevor Noah: Son of Patricia〉으로 처음 알게됐는데 당시에는 그냥 재밌는 코미디언을 한 사람 더 알게 되어서 든든한 기분이었다(스탠드업 코미디가 재밌기란 워낙에 좀 어렵다). 물론 코미디언으로서 트레버 노아라는 사람이 상당히 능력 있는 퍼포머라는 점은 높이 사야겠지만(출력이 좋은 스피커나 엠프 격이라고 할까?), 엄밀히 따지자면 대다수의 콘텐츠 자원 출처는 퍼트리샤로 정정 표기해야 함을 친절히 알려주는 게 바로 이 책 《태어난 게 범죄》이다. 이 자원이라는 게 일종의 상속 절차를 거쳐 전해진 탓인지 앞으로 두 사람 간에 저작권 분쟁이 일어날 일은 일절 없을 거라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게다가 퍼트리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닿은 건 트레버의 혁혁한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가 되고 말글도 어디로든 쏘기를 해야 개그가 되는 거니까(그게 잘된 개그인지 망한 개그인지 판단하는 건 무조건 그다음의 일이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트레버의 시끌벅적한 주변과 개인적 생애 주기를 갈지자로 넘나들며 서서히 나아간다. [3부]쯤으로 가야 대중들에게 익숙한 트레버 노아가 고개를 빠끔 내민다. 풋풋한 얼굴로 "웨이터가 돼서 돈을 벌고 싶다" 말하던 다큐 〈You Laugh But It's True〉 속의 한 장면에서처럼. 성실한 노동으로 벌어먹고 사는 그 최소한의 수준으로 멀쩡하게 기능하는 사회를 꿈꾸는 청년의 뒤로 생경한 남아공의 풍경이 대비되는 그 모습을 딱 2년 전 즈음 나 역시 생경한 런던의 어느 에어비앤비 임시 숙소에서 앞으로 먹고살 걱정으로 잔뜩 쫄아서는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봤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하지만 어쨌건 현재의 트레버 노아는 겁나게 돈도 잘 벌고 일도 잘하는 코미디언 겸 방송인이 됐으므로 우리는 각자 우리네 먹고살 길 모색이나 하면 되니, 이 책은 마냥 즐기는 마음가짐으로 읽어도 좋다. 특히 [1부]는 트레버 노아가 어째서 그렇게나 멀쩡하게 재밌는 코미디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비밀의 열쇠가 되어주는 파트다. 물론 그 열쇠는 퍼트리샤 놈부이셀로 노아다. 이 두 사람은, 뭐라고 할까. 딱 요즘 내가 뒷북으로 보고 있는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필구 같은 콤비라는 느낌이 든다. 그냥 생물학적 엄마와 아들로 퉁쳐지는 납작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함께 부지런히 일군 "삶"이라는 이름의 공동 작업물과 그 시간이 담보하는 그런 복잡다단한 인연 말이다.

트레버 노아를 좋아하는 이들이 꼽는 그의 독보적인 장점 하나는 원초적인 소리를 다루는 능력일 것이다. 《태어난 게 범죄》에도 언급되지만 원체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음성 지원이 되는 기분으로 읽었다(이건 사실 번역자와의 합작이긴 하다). 좀 신기한 기분이었다. 내게 아직 좀 데면데면한 사이인 애나 아카나의 책을 읽을 때는 알지 못한 그런 기분.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내 실마리를 찾아냈다. 나보다 훨씬 더 애나 아카나와 친한 독자들에게 애나의 책은, 트레버 노아의 책이 내게 말을 걸었던 것과 꼭 같이 애나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줄 것이다. 이걸 배우고 나면 책 만드는 사람의 역할은 한결 간단해진다. 책 속의 말이 읽는 이에게 무사히 전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독자에게 책이 가 닿을 수 있는 연결고리를 부지런히 짜 그물처럼 촘촘하게 넓혀가며 잇는 것.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이거면 될 것이다. 내가 트레버 노아의 바로 이 책, 《태어난 게 범죄》를 만난 재밌고도 신묘한 우연이 더 많은 이에게로 퍼져나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책 중에서도 특히 저자가 일인칭 시점으로 말을 거는 에세이는 저자와 친해지면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는데, 나처럼 트레버 노아의 스탠드업 실황을 먼저 본 후에 책을 읽는다면 남다르게 다가오는 문장들이 여럿 있을 것 같다. 물론 그 반대 순서로 책을 읽고 공연 실황을 보는 방법도 좋다. 《태어난 게 범죄》는 출간 후 일찍이 영상화 프로젝트도 성사가 됐는데, (무려) 루피타 뇽오가 퍼트리샤 역으로 캐스팅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뒷북으로 전하며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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