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번역가
임윤 지음 / 지옥탈출판사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어쩌다'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아마 It happened to be…, 정도의 뉘앙스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저자의 이 '어쩌다'는 사실은 저자에게 찾아온 기회 자체에만 한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어쩌다보니 전업으로 번역을 하게 된 한 사람의 이후 과정은 누구보다 목적 지향적이면서 철저히 실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 책 제목의 '어쩌다'는 차라리 겸손한 너스레에 가깝다.


예약구매로 한참 전에 받은 택배를 집에 돌아와서야 열어보았다. 이런 표현은 좀 웃기지만, 저자는 한국 산업번역계의 선구자 같은 존재다. 나 역시도 저자 덕분에 산업번역이 뭔지를 구체적으로 배웠다. 나는 출판번역-영상번역-산업번역에 다 애매하게 조금씩 발을 담가보았는데 저자가 책에서도 소개하지만, 이 러프하게 나눈 세 분야만 해도 필요한 소양이 퍽 달라서 같은 언어쌍이래도 저 사람은 출판번역만 해야겠는데?랄지, 영상번역에 딱인 사람, 산업번역에 최적인 사람이 제법 극명하게 나뉘어서 재밌다. 물론 잘 맞는지 여부와 실제로 어떤 분야를 주력으로 맡을지 여부는 별개지만.

제목 탓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일화식으로 풀어놓은 에세이로 착각하기 쉽지만 막상 열어보면 간결하고 담백한 정보성 비문학에 가깝다(굳이 구분을 해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 군더더기 없음이 어떤 느낌이냐면, 광고에서처럼 책을 탈탈 털어 뿅뿅 튀어나오는 각설탕을 주워다 버리고, 꽉꽉 손에 힘을 주어 비틀어 짠, 순도 100%의 무설탕무지방 실용서라고 한다면 설명이 될까.

이 책은 1) 재택근무를 원하며 2) 비교적 영어울렁증이 덜하고 3) 머릿속이 시끄럽지 않아 저자가 이끄는대로 의심없이 잘 따라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제법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3번이 중요하다. 현재 나는 굳이 저 세 분야 중 하나를 고르라면 영상번역 쪽 일을 가장 많이 경험해봤고 이쪽이 상대적으로 내게 가장 잘 맞다고도 생각하는데 세부 분야가 달라도 이 책의 내용이나, '한국산업번역교육(이자 번역실미도)' 커뮤니티의 도움을 톡톡이 받았다. 그리고 사실 기본적으로는 일감이 넘치지 않고서야 애초에 분야를 고르기도 쉽지가 않다. 그냥 셋 다 들어오는 대로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지원하고 공부하는 게 차라리 속편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나 신기한 건 저 세 분야 모두 꾸준히 지원하고 준비하면 어느 정도는 길이 뚫린다는 점이다. 몇 년 전 나와 함께 스터디하던 출판번역 지망생들 대부분이 지금은 번역 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책을 갖게 되었고(자리를 잡는 건 또 다른 일이긴 하겠지만. 초반 3-5권까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내 경우도 아직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야 어렵겠지만 매달 소소하게 영상번역을 하기도 하고, 데드라인이 하루 이틀 남아 내게까지 넘어오는 산업번역 일감을 맡기도 한다. 솔직히 벽에다 대고 혼잣말 하는 기분으로 메일을 보내던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상이다.

요즘 나는 듀오링고에 푹 빠져서 매일 아침 빼놓지 않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왕왕 산업번역의 흔적을 발견한다. 맞춤법이 사람이 한 건지 기계가 한 건지 헷갈리는 번역을 만날 때면, 내가 납품한 번역도 나사 하나 풀린 채로(?) 인터넷 세계 어딘가를 돌아다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묘한 뿌듯함이나 겸연쩍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이따금 피드백 메일을 받을 때면 기분이 두근두근하고, 좋은 말을 들을 때면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잘못한 부분을 지적 받으면 정신이 퍼뜩 들어 반짝 공부에 몰두하기도 한다.

학부를 겨우 나와 가늘고 짧기까지한 회사 생활이 경험의 전부였던 내게 산업번역은 자립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내가 어디가서든 컴퓨터와 와이파이만 있으면 어떻게든 먹고는 살겠는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건 분명 저자의 혁혁한 공이다. 《어쩌다보니 번역가》와 '한국산업번역교육'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이런 가능성과 자유를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에 담기지 않은 저자의 사적인 산업번역 영업글(?) 및 그 외 다양한 관련 정보들은 블로그와 한국산업번역교육 사이트(포럼 게시판은 무료 열람 가능)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유튜브 채널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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