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가방끈이 길어졌습니다만
전선영 지음 / 꿈의지도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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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아마 It happened to be…, 정도의 뉘앙스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저자의 이 '어쩌다'는 사실은 저자에게 찾아온 기회 자체에만 한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어쩌다 미국 유학을 가게된 한 사람의 이후 과정은 누구보다 목적 지향적이면서 철저히 실천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니 책 제목의 '어쩌다'는 차라리 겸손한 너스레에 가깝다.

이 책은 저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방송 프로그램 PD를 꿈꿨던 탓인지 컨텐츠 구성이 알차서 재밌게 보고 있다. 《어쩌다 가방끈이 길어졌습니다만》는 에세이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저자가 유학으로 시작한 미국 생활을 통해 쌓은 온기 있으면서도 잘 벼린 통찰을 들려준다. 전에 들어본 영작 문체 수업에서 배운 신-구 순으로 글의 화제를 전환하는 방식(단락 안에서 익숙한 화제-> (소개할) 낯선 화제로 배치하는 방식)이 문득 떠올랐다. 나 역시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중간중간 언급되는 책 인용구를 유심히 읽었고 제목을 알아두기도 했는데 그런가 하면 저자가 즐기는 산 타는 취미 같은 건 내 취향과는 영 거리가 멀었음에도 이미 한껏 친밀감을 갖게 된 후여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난생처음으로 '나도 등산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미국이라는 비교적 낯선 타지(이제는 저자에게 또 하나의 보금자리가 되었지만)에서의 생활과 유학 경험을 읽으면서 미국 국경도 넘어보지 못했건만 깊은 공감을 느꼈다. 책의 중후반부는 지난 주에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었는데 주책맞게도 아주 조금 울었다(나는 뭘 읽고 보든 잘 우는 편이기는 하지만). 이미 문자로 인쇄되어 당사자는 훌쩍 지나온 과거의 이야기를 뒤늦게 쫓아가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그 속에서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주변의 온기에 자못 찡한 기분으로 안도하게 되는 건 참 웃기고도 신기한 감정이다.

특히 삶이란 결과가 전부가 아님을 책 전반에서 여러 일화를 통해 세세하고도 맛깔나게 곱씹어볼 수 있어 좋았다. 영국에서 지낸 1년 여의 시간 동안 아주 친한 친구나 가족 외에는 사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 딱히 얘기할만한 게 없어서, 기를 쓰고 다른 나라로 나와놓고는 고작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건가? 정답을 전부 비낀 답안지를 무작정 채워만 가는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는데, 《어쩌다 가방끈이 길어졌습니다만》을 읽고 찍찍 소나기가 내리던 내 답안지도 소심하게나마 반달 모양으로 채점 결과를 고쳐주었다.

금요일에 도착해서 거의 비몽사몽으로 보내다가 일요일에는 아주 오랜만에 동네 도서관에 가 저자가 소개한 올리버 색스의 책 두어권을 빌렸다. 런던에서는 서블릿으로 지내느라 대영 도서관은 커녕 동네 도서관 출입도 시도 한 번 못 해 봤다(주거 증명이 필요하다). 그러고보니 도서관에 들르기 직전엔 조조로 한국어자막을 띄워주는 영화도 한 편 보았다. 평생 누려온 한국어책과 한국어자막이라는 게 호사로 느껴지는 시기야 잠깐이겠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만끽해보려 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은 익숙함에 가려, 이후 영국에서 지내면서는 저자의 표현대로 '생소함에 짓눌려' 곧잘 놓친 풍경들이 많았다. 살아간다는 건 특별한 순간을 기념품 삼아 예쁜 틴케이스 안에 그득히 모아가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먼지 쌓인 틴케이스만이 오롯이 남는 삶이라면, 그래서 말년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속에 든 빛바랜 기억을 만지작대는 게 전부라면, 그보다는 딱히 내보일 게 없대도 현재의 아름다움을 지나치지 않고 느끼며 사는 삶이 되면 좋겠다.

새로운 풍경 속에 놓일 기회를 '어쩌다' 한 번 더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번보다 더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도록, 그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내 안에 잘 새길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꾸준히 단련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보게 되는 하루다. 저자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도 함께 소개해본다. 덕분에 알게된 '미라클 모닝' 루틴을 시도해보려 요즘은 관련 책을 읽는 중인데 새해를 맞이하여 새 마음으로 도전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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