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의 응답 - 우리가 궁금했던 여성 성기의 모든 것
니나 브로크만.엘렌 스퇴켄 달 지음, 김명남 옮김, 윤정원 감수 / 열린책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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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지역이 별세계이리라는 환상이 내 안에 심어진 건 10년 전 즈음이 시작이었던 것 같다. 북유럽으로 유학을 간 어느 여성의 블로그 글을 구독해 읽었고 핀란드 같은 국가의 남자들이 한국인과 성향이 비슷해서 연애하기 좋다더라 하는 얘기도 본 적이 있으며, 스웨덴 브랜드 이케아의 인기란 한국은 물론이고 여기 런던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런던도 오래된 집들을 심심찮게 리모델링(또는 리퍼니싱)하는데 내가 지금 지내는 집도 집주인이 이케아에서 한꺼번에 사온 가구와 장식으로 집안을 새로 꾸며 놓았다.

개인적으로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서구권 대중문화에 빠져들게 되면서 미국도 별 거 없다, 유럽도 별 거 없다와 같은 허구의 환상 깨부수기가 여러 차례 이어지기는 했지만, 이유를 모르게 그래도 북유럽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그들이 말하는 인권이라는 게 자국의 백인을 뜻하는 다른 말이라는 암묵적 은유를 감안한다고 해도) 늘 '그래도'가 입구를 막아서고는 길을 비켜주지 않아 우연히 유지되었다. 지난 해 부국제에서 <우먼 앳 워> 같은 아이슬란드 영화를 본 탓도 있을 것 같다(엄청 재밌음).


그리고 『질의 응답』 을 통해 마침내(?) 지구의 남성 인류(혹은 그들을 둘러싼 시스템)에 관한 대부분의 개인적 환상이 차라라 무너져 잔재를 흩뿌리며 사라졌다(Frozen 같은 분위기로 무너뜨리는 것이 어울리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우선은 그것이 아주 예상 밖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한국 여성들이 노르웨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아주 손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솔직히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 책 『질의 응답』 을 나는 이성애-유성애자 여성을 위한 A/S 목적의 도움말 모음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그래도 괜찮다. 앞으로 조심하면 돼" 하고 호호 약을 발라주는 그런 사후 매뉴얼이라고 할까.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우선순위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사례를 죽 읽고 나면 나같은 탈이성애 지향-무성애자 여성은 읽는 중에 하품은 조금 했다손 쳐도, 다소 안도의 감정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했어도 괜찮아" 만큼이나, 내가 살면서 듣고 싶던 말 "그렇지 않았어도 괜찮아",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무색의 양초로 꾹꾹 눌러 새긴 그 말을 불빛으로 그을려 가며 읽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 책은 (심지어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해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비교적 가시화 되지 못한 모든 성적 분류로 세분화된) 여성 모두를 위한 매뉴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성인(혹은 그 언저리)이 되어 하는 독서가 재밌는 점 하나는, 이러한 텍스트를 읽을 때 '--하는 듯 하다'와 같은 결론 내려지지 않은 말투를 통해 저자가 묶어낸 이 결과물이 할 수 있는 한 온갖 노력을 다 짜내어 최전선에서 쓰인,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 중일 이야기라는 점을 알아채고 입맛을 다시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남작가 이상이 이야기하는 '박제된 천재' 같은 표현의 의미 따위야 알 게 뭐냐 지나치더라도, 『질의 응답』 이라는 이름을 통해 박제된 2010년대 후반까지 여성들의 삶을 포착한 이 스냅샷만은 많은 여성들이 기꺼이 유쾌한 기분으로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냐면 우리는 계속해서 싸울 것이고, 이 이야기는 틀림 없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과거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발목 정도까진 이미 굳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무리로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제목이다. 반쪽짜리 사대주의를 품고 영국으로 와 매일 한국어로 트위터나 끄적이면서 밖에 나가선 고작해야 영어로 '알겠어'를 어떻게 해야 더 잘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지내는 나로서는, 이런 오롯이 한국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위트(외래어 죄송…)를 발견할 때면 그 희열감에 소름이 훅 끼쳐오는 것이다. 말 그대로 모두가 쉬쉬하던 의문에 속시원히 답해주는 Q&A 세션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면서, 해리포터 세계관 속 볼드모트처럼 오랜 시간 이름조차 언급되지 못하고 살아온 존재인 질이 마침내 답답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서서 우리의 물음에 응답해온다는 느낌이 들어 재밌다. 역시 응답의 민족(?)과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

그러고 보니 대표적인 사대주의 로망의 대상 국가 미국 방송에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도 무려 2017년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시즌 3 (및 이를 언급하는 CBS The Late Late Show)가 최초임을 감안하면 이 '사대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사어가 되는 일도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드나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빨리 많이 듣고 배우게 되는 게 penis [소싯적 팬픽에서는 페니스라고 많이들 썼지만 실제 발음은 피너스에 가까워서 늘 스펠링을 헷갈리게 된다], sperm 같은 단어인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편중된 시차라고 볼멘소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거라면 죄송(2)….


이 책의 노르웨이어 원제는 Gleden Med Skjeden 인데 영어 단어로 바꿔 보자면 The Joy with the Vagina 정도의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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