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인 블루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 1
케리 그린우드 지음, 한지원 옮김 / 딜라일라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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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드라마 버전(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추천은 예전부터 봤는데 왜인지 잘 보게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책을 읽다 생각이 나서 '코카인 블루스'가 커버하는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찾아보려고 한 번 더 틀어봤는데 도중에 관두었다. 시즌1의 첫 에피소드 이름이 같은 걸로 짐작하건데, 한 권 분량을 1시간 길이 에피소드 한 편으로 만든 것 같다.

'프라이니 피셔'는 이런 추리 소설 장르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다소 뻔한 치트키 설정들을 차곡차곡 잘 걸쳐입은 인물이다. 돈이 많지만 가난을 모르지 않으며, 품위 있고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차림새 등에도 적절히 드러난다. 사랑에 목매지 않지만 아름다운 남자와 보내는 시간을 마다하지 않는 이성애자라는 점마저도 그렇다.

'홈즈와 왓슨'까지는 아니더라도(<엘리멘트리> 얘기 맞음) 프라이니 역시, 유능하고 충실한 어시스트 '도로시'를 만나게 된다. 시리즈를 여는 이야기인 『코카인 블루스』 에서는 다소 미약했으나 이후 활약이 기대되는 조합이다.

"저는 이제 아가씨 사람이에요."

도로시가 선언하듯 말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첫 회사 그만두고 한참 놀다가, 억지로 프론트엔드 코딩 배우러 국비 지원 학원 다니던 시절(취업성공패키지로 지원비 40만원 받아 근근이 살고 학원 교통비로 거의 전부 썼다)에 인천 집에서 사당동까지 아침 9시에 맞춰 가느라, 거의 출퇴근에 가까운 시간표로 움직일 때 아침 일찍 TV를 켜면 정말 볼 게 없었다. 그 때 폭스였나 어디 채널에서 <명탐정 몽크> 해주는 걸 종종 봤는데, 이 '프라이니 피셔' 시리즈의 포지션이 약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겪어본 적 없는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어딘지 아득하게 블러 처리된 옛스럽고 옛스럽게 재밌는 이야기. 달리 말하면 지금 보기에 이야기 자체로의 재미는 좀 덜하다. <명탐정 몽크>처럼(오프닝 음악만 이상하게 좋아함).

2019년을 사는 내가 보기에, 프라이니 피셔는 물론 멋진 사람이지만, 그의 차림새나 외적 요소를 묘사하는 대목들은 솔직히 읽으면서 좀 피곤스러웠다. 아름다운 탐정이라기 보다는, 여자라서 아름다워야 하는 탐정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게다가 우리는 수사물을 통해 튀는 외모나 차림새를 한 인물은 신분을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며 자란 세대가 아닌가(?). 트레버 노아가 자신의 넷플릭스 스탠드업 쇼에서 '이드리스 앨바가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다면?' 하는 가정으로 펼친 상황극이 떠오르는 시점이다(여기선 백인 천지라서 비백인이 아무리 도망쳐도 금방 눈에 띄고 만다는 게 요지였다).

셔츠 하나와 미소만 걸친 채,

프라이니는 멜버른 최고급 호텔로 향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후반부에 들어서야 내가 이 이야기를 마냥 재밌게 읽을 수 없었던 게 내 개인적--현시대적인 피로감 탓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프라이니의 차림을 묘사한 부분이나, 번역에서 살린 '여의사', '여순경' 같은 단어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대단한 여자예요. 형사로 모셔 올 수 없어 유감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던 세상인걸요."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1989년 출간된 이 『코카인 블루스』 는 분명하게, 최선을 다해 여성의 '임파워링'을 말한 이야기다. EMPOWERING이나 BAD ASS같은 단어는 매번 볼 때마다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영 모르겠다. 어쨌건 프라이니 피셔는 궁극적으로는 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여성'이라는 정체성이자 수식이 그의 이름 앞이 아니라 뒤에 가 있단 느낌이 들어 좋았다.

심장이 눈에 띄게 빨리 뛰었고

숨도 한층 가빠졌지만,

프라이니는 자신이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을 알았다.

모험가는 타고나는 법이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스포주의!

작가는 프라이니 주변의 여성들도 매력적으로 그렸다. 도로시와 '여의사' 맥밀란 박사, 빠뜨릴 수 없는 악당 캐릭터 '리디아'까지.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삶과 일에 몰두하는 인물들인데(이야기 내내 거의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 나온다), 특히 이야기 후반부에 프라이니가 리디아를 묘사하는 대목이 재밌다.

"아뇨. 리디아가 사랑하는 건 권력일 거예요.

우리를 죽이겠다고 할 때 그 눈빛 봤어요?

사랑에 빠진 여자처럼 반짝이더군요.

그는 권력을 사랑하는 거예요."

스포주의!-->

제임스 본드에게 매료되는 여성 캐릭터처럼, 프라이니 피셔 곁에도 '사샤'라는 (진짜) 키링남이 등장한다. 웬만해선 다음 이야기에 다시 나올 것 같지 않은 이 아름답고 이렇다 할 임펙트 없는 남자에게는 이런 귀여운 대사도 주어진다.

아 이런, 누가 내 돈을 상속받으려나?

유언장도 작성 안 해뒀는데.

유기묘 보호소에 기부하는 걸로 해뒀으면 좋았을걸.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작가가 '노동자 계급'을 두고, 기득권층 인물의 입을 빌려 이런 이야길 한 것도 좀 재밌다.

"하지만 그걸로 술이나 사 마실 게 뻔해요! 노동자 계급이 어떤지 아시면서!"

"물론 그러겠죠, 부인. 하지만 그 돈으로 술을 사 마시면 안 될 건 또 뭐랍니까?

안 그래도 사는 게 힘들고 괴롭고 낙도 없는데, 뼈에 사무치는 가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위안거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루하고 무기력한 기분 전환일진 모르지만, 그런 즐거움마저 빼앗는다면

너무 무정한 것 아닐까요? 부인의 후한 대접 덕분에 지금 우리 모두는

이렇게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말입니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뒷쪽에 실린 『코카인 블루스』 를 번역 출간한 출판사 딜라일라북스의 소개글도 좋았다.

딜라일라북스는 '딜라일라'라는 이름에 내포된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거두고

여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자는 의미에서

여성 작가와 여성주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출판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중후반 번역 출간된 이 책의 작가 소개에 '비혼'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에는 이 단어가 통용될 수 있게 여럿이 힘을 모은 사회적 분위기 영향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 시리즈는 2020년을 바라보는 현시점에 읽기에 어떤 점에선 분명히 낡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낡고 재밌는 이야기를 '고전' 혹은 '동화'라고 부른다. 언젠가 '코르셋'이란 개념이 성별과의 결부를 영영 끊어내는 시점이 온다면, 그 때 이 책을 읽게 될 어린이와 청소년 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재밌게 이 '머나 먼' 옛 이야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내가 이런 꼴로 나가진 않지.

저기 커다란 검정 망토를 줘봐.

모자는 들고 가면 되고. 어디 보자, 다 챙겼나?

돈, 총, 담배, 라이터…… 됐어.

안녕, 도트. 내일 보자고.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프라이니 피셔 미스터리1 『코카인 블루스』 중

'안녕, 도트. 내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라고 인사하며 작별을 고하는 이 근사한 영웅 얘기를 누가 마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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