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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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다가 읽은 책이었다. 초반에는 '어슐러 K. 르귄'이 만든 어느 세계관이 연상되기도 했다. 세계관을 이루는 모든 것이 이질적이고 새롭다는 걸 제외하면 접점이랄 게 없다시피 하지만. 그래서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다가 훅 멱살을 잡혀 빨려들어간 시점이 있는데 그 순간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순전히 내가 그 당시 이 책을 읽다 내릴 지하철역을 놓쳤기 때문이다. 솔직히는 하기 싫은 일을 하러 가는 길이어서 내리기 싫은 마음에 더 열심히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페이지를 전부 다 넘긴 지금까지도, 레스터 스퀘어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재밌게 읽느라 호본 역에서야 그걸 알아챈 책으로 살짝 왜곡해 기억에 남기기로 마음 먹었다.

낯선 세계관을 머릿속에서 얼기설기 다시 쌓아올려가며 읽는 일에는 퍽 에너지가 든다. 게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간의 연관 관계도 아주 후반부에 밝혀지는 것을 감안했을 때 휙휙 전환되는 인물 정보를 임시 메모리에 올려두고 읽자니 더욱 힘이 들기도 했다. 대신 파편처럼 흩어진 인물들 간의 실마리가 별안간 밝혀지는 그 순간의 쾌감은 솔직히 이 모든 수고로움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내 로가 이름을 정했어요."

『다섯 번째 계절』 중


"그러고는 문득 네가 통키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다섯 번째 계절』 중


이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그 공간과 시간에 놓인 인물의 여정을 따르는데, 그 갈래가 천천히 하나씩 합쳐지는 순간은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는 전자책이 참 좋다. 종이책이었다면 나는 분명히 책장을 깨끗하게 놔두고 따로 메모하는 방식을 택했을 테니까. 읽고 나면 이야기의 전개 방식 탓인지 살짝 영화 <디 아워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번역'에는 언제나 상당한 정신 노동과 수고가 따르지만 이 소설은 특히 더 독자가 번역자에게 의지해야 하는 작품이다. 대강 얼기설기 번역의 모양새를 갖추는 게 가능한 텍스트가 있고, 그런 시도조차 꾀하지 못하는 텍스트가 있는데 『다섯 번째 계절』 은 분류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마음을 푹 놓고 기대어 읽어도 좋은 번역본이고.

북한 뉴스나, 노년층의 말 습관을 보면 아 저런 찰진 욕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욕설도 아주 재밌어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다. 단연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헌은 "삭아죽을!" 이다.

'우리는 사슬에 묶여 있는 신이지만

저건 아니지. 삭아죽을, 그래.'

『다섯 번째 계절』 중


불똥쌀 대지여, 감사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지랄." 상스러운 말을 하는 것은

부끄러우면서도 흥분되는 일이다.

꼭 반지를 낀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다섯 번째 계절』 중


『다섯 번째 계절』 이란 이야기는 물론이고, 작가 N. K. 제미신 역시 아주 재미있는 문장을 쓰는 작가라서, 전개나 흐름과 관계 없이 표현력이 재밌어서 표시해둔 문장도 많았다. 그리고 사실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가 늘어놓는 이야기라면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다, 는 마음이기도 했고.

"마치 팔꿈치를 단단한 곳에 부딪쳤을 때

손가락 끝까지 찡 하고 감각이 멍해지는 것처럼,

마치 그 부분을 관장하는 정신이 저려서

마비된 것처럼 얼얼하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자신에게 로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개새끼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귀싸대기를 갈기는 것과 같다.

그건 일종의…… 선언이다.

무엇을 선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번째 계절』 중

"알라배스터가 멍청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너는 멍청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닌

사람들을 위해 아껴 놓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대꾸한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이야기 속에서 내가 가장 거리를 좁혀 가며 이입했던 이들은 펄크럼에서 자란 '오로진'들이었다. 새로운 세계 속에 놓인 새로운 존재를 통해 내가 느낀 뜻밖의 감정은 '동질감'과 거기서 비롯된 연민이었는데, 어쩌면 이 '새로움' 속에서 발견되는 '익숙함'이란, 모두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이야기들 속에 묻혀 살다시피 하면서도 인류가 끊임 없이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새로움을 갈구하지만 그 새로움이란 속성에는 늘 '익숙함으로의 회귀'가 빠지지 않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건 작가가 겹겹이 옷을 입히고 공들여 덧붙인 겉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날 것의 진실이다. 유산균만큼이나 캡슐이 필요한 존재들이다(장까지 안전하게!). 그 연약한 것이 타인의 머리와 마음에까지 안전하게 닿게 하는 일이란 때로는 상상 이상의 끈기를 요구한다.

돌의 가르침은 말한다. 안전이 먼저, 생존이 최우선이다.

죽은 영웅 보다는 산 겁쟁이가 낫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아, 세상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다섯 번째 계절』 중

난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

우리를 좋아해 주길 바라지도 않고.

중요한 건 저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야.

『다섯 번째 계절』 중

그녀는 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행동해야 하며,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예리한 유리칼처럼 휘둘러야 한다.

그녀는 차분하고 냉철하게 분노하되,

괴물이라서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험담을 듣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젠장, 변명은 해서 뭐한담?

그래, 그것은 사랑이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1년 내내 하루 종일

그 애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다섯 번째 계절』 중

영국에 오면서 좀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 '고립'이나 단절에 관한 문장도 여럿 있어서 남달리 읽은 대목도 여럿 있었는데, 인용이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어서 딱 하나만 더 소개해야겠다.

다마야는 아주 오랫동안 흐느낀다.

오늘 밤 본 것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 중

『다섯 번째 계절』 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두 번 이상 읽어야 하는 책이다. 비단 나처럼 부록으로 실린 세계관 주요 관념 소개를,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발견한 독자가 아니더라도. 모르는 상태에서 퍼즐 조각처럼 맞춰가는 재미가 있는 책에는 짝꿍처럼 모든 걸 알고 볼 때의 재미가 항상 동반되기 때문에.

앞서 말했듯 문장을 재밌게 쓰는 작가의 책 감상을 남기는 만큼, 마무리는 작가의 말에서 가져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작가가 글을 쓰다가 돌아 버리지 않으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다섯 번째 계절』 감사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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