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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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는 20세기 어린이들을, '독서 경험'을 두고 굳이 줄세워보자면 나는 꽤나 뒷쪽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수준이다. 양극 차를 감안한다고 해도 어찌됐든 중간 이후일 것이다. 새삼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한 번 더 보기로 결심한 시점에서였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이 뭔지 거의 몰랐다. 그저 어렸을 때 TV로 배운 양 귀에 나사못 같은 걸 끼고 다니며 살갗을 기운 자국으로 뒤덮여 있는, 어쩌구 박사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체라는 것--물론 이것마저도 그 박사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점에서 전부 틀렸지만, 이 학습의 전부였다(지금도 머릿속으로는 '두치와 뿌꾸'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고 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봤던 <메리 셸리>가 그다지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은 것은. 메리 셸리가 써내려 간 이야기를 달리 알지 못해도 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쉬운 마음으로 보러 간 영화였고 그래서 보고 난 후에 그다지 마음에 담기지도 않았다.

영국에 온 뒤 넷플릭스UK에 올라와 있는 <메리 셸리>를 다시 볼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던 이유는 아마 이 영화가 '실패'로 기억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고 다시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작가 메리 셸리가 그의 이야기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를 출간한 것이 19세기 초인 만큼(딱 200년 즈음의 시차) 당시 작가가 살아간 시대 상을 대강이나마 이해하려는 노력 역시 위 영화의 맥락에 포함될 것이다. 이 책의 리뷰가 '아동 도서' 섹션으로 분류되는 것에 순간의 머쓱함(나도 어렸을 때 미리미리 이걸 읽었어야 했던 건가)을 잠시 느끼기는 하지만, 그게 두려워 피하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이라고 믿는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납작하게 보자면, 특히 21세기 인간에게는 아주 밋밋한 이야기다. 액자의 액자의 액자 같은 구성으로, 사람의 입을 빌려야 전개될 수 있는 사건의 흐름이란 아마 그 시대적 특성이리라 짐작해보지만, 그 외에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이 만든 존재와 자신을 단숨에 떨어뜨려 놓고 도망이나 일삼으며 쉽사리 그 존재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모습을, 이야기 바깥에서 영 찝찝한 표정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가디언의 리뷰 내용 중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창조물을 극악무도한 악마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그 존재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우리가 그 고독을 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 합리화에 젖어 사는 인간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 대목에 공감하게 된다.

주로 나는 작가가 남겨둔 생각의 자취를 발견하려 노력하며 읽었는데, 이게 영화에 몰입하는 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는 메리 셸리의 삶과 그로 인해 생겨난 생각이 투영된 대목들을 찬찬히 곱씹어보게 되었다.

"I asked, it is true, for greater treasures than a little food or rest: I

required kindness and sympathy; but I did not believe myself

utterly unworthy of it."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15

"How mutable are our feelings, and how strange is that clining

love we have of life even in the excess of misery!"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20

"Of what a strange nature is knowledge! It clings to the mind,

when it has once seized on it, like lichen on the rock. I wished

sometimes to shake off all thought and feeling; but I learned that

there was but one means to overcome the sensation of pain, and

that was death--a state which I feared yet did not understand."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13

특히 세 번째 인용, 앎으로써 느끼게 되는 고통과 거기에 수반하는 여러 생각은 작가에게는 물론이고, 현재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영화 <메리 셸리>에서, 언니의 원고를 읽고난 클레어의 반응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 속에서 메리가 완성한 자신의 원고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사람은 남편 퍼시인데, 그는 '이 놀라운 창조물을 아주 희망적이고 완벽한 존재, 이를 테면 천사 같은 걸로 바꾸면 어떨까?'하고 묻는다. 그에 반해 동생 클레어는 메리가 자신의 소설을 통해 전하고 싶어한 메시지를 단번에 알아챈다. '우리 둘 다 이게 유령 얘기 같은 게 아닌 걸 알잖아. 이렇게 버려지는 기분을 완벽하게 묘사한 건 처음 봤어.'

"그건 내 이야기였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언니가 만든 괴물이 겪는 깊은 고통에

함께 아파할지 궁금해지지 않아?

Because it was my own.

I wonder, how many souls will sympathize with your creature's torments?"

- Mary Shelley, 2017

소설 속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바깥의 메리 역시 견고한 거절의 장벽에 둘러싸인다. 그 이유란 맥빠지리만치 간결하다. 정식 혼인 관계도 아닌 남자와 함께 사는 열 여덟짜리 어린 여자의 이름을 걸고 출판하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회적 관념이자 핑계.

2010년대 후반 <프랑켄슈타인>을 꺼내 읽는 건 어느 때보다 그 의미가 깊다. 위의 리뷰어가 한 이야기처럼 '프랑켄슈타인' 이후 인공지능을 다룬 책들은 모두 메리 셸리에게 조금씩이나마 빚을 진 셈이다. 어떤 것을 인간(정확히는 인간의 지능)됨으로 볼 것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 고차원적 기술 발전을 언제나 앞서야 함을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내는 목소리를 통해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들려준다.

아마 19세기와 현재를 아우르는 유일한 생각은 이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So much has been done, exclaimed the soul of Frankenstein --

more, far more, will I achieve: treading in the steps already

marked, I will pioneer a new way, explore unknown powers, and

unfold to the world the deepest mysteries of creation."

-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 Chapter 3

번외로, 독학으로 영어를 마스터한 곰돌이 패딩턴에 이어, 혼자 불어를 마스터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말하는 걸 보니 여기 사람인 것 같은데, 프랑스 인이오?By your language, stranger, I suppose you are my countryman; are you French?'라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에게 동아시아인으로서 경외와 괴리를 동시에 느끼는 바이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동화적으로 재밌었던 대사는, 프랑켄슈타인에게 그의 괴물이 '당신의 결혼식날 밤 당신을 찾아가겠다I will be with you on your wedding-night!'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내가 본 번역본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시대 상을 감안하면 아주 명백하게 man = 인간, woman = 여자로 분리되던(지금도 크게는 다르지 않은) 시기지만, 그래도 'Can any man be to me as Clerval was; or any woman another Elizabeth?' 같은 대사가, any man = 어떤 사람 / any woman = 어느 여자로 된 건 좀 아쉽다. 시대적 맥락을 살리는 건 아주 미묘한 문제지만 개인적으론 이런 건 열심히 살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메리 셸리>는 조금 뻔하지만, 메리가 직접 읊는 소설의 마지막 구절로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메리가 고통 속에 빚어낸 이야기와 거기에 켜켜이 쌓인 감정을 더는 떠올리지 않고 깊이 묻어두겠다 말하는 대사나, 그의 괴물이 그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해보자면, 몇 번 더 곱씹어보게 되는 문장이다.

"You were soon borne away by the waves

and lost in darkness and distance."

- Mary Shelley, 2017

번역본은 전자책으로밖에 못 읽는 상황이라 나는 다른 버전으로 봤지만, 링크는 좋아하는 번역자의 것으로 공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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