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 런치의 앗코짱 앗코짱 시리즈 1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네이버의 책문화판을 즐겨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들이 새로 나오고, 주제별로 나눠진 내가 모르는 책들을 소개받고 읽어보는 게 꽤 재미있다.
그러던 차에 출간 전 연재로 이 책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를 만나게 됐다.
1~2편 읽다가 이건 꼭 읽어봐야겠는데 싶어서 따로 메모까지 해두었다. 
저자 소개란을 훑다 보니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서점의 다이아나]의 저자님인 걸 알고 더욱 반가웠다.  

 
"다음주 일주일 동안 내 도시락을 싸주지 않겠어? 이 정도 도시락으로도 괜찮으니까."
"네? 제가요?"
무심결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너지. 또 누가 있다고."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지극히 진지한 얼굴이다.
"외근할 때 도시락이 하나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
그런가? 미치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시락은 먹는 장소와 시간을 정하지 않고 갖고 다니면 짐이 된다. 전에 요타로가 자고 간 날 아침에 도시락을 들려준 적이 있다. 한 개 싸는 거나 두 개 싸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이제 그런 짓 좀 그만해. 무겁단 말이야. 먹을 타이밍과 장소를 찾아야 해서 피곤하다고."
그는 손을 대지 않은 도시락을 거칠게 돌려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그의 마음은 떠났던 것이다.
"이봐,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내 말 듣고 있어?"
앗코 여사의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물론 사례는 할 거야. 내 일주일 점심 코스와 바꾸기 놀이를 하자고."
"점심과 바꾸기 놀이요?"
"그래. 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가는 가게도 메뉴도 항상 정해져 있어."
"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요?"
"그럼. 난 루틴화하는 걸 좋아해. 무슨 일이든."
"네에……."
"어때? 아침에 너는 내 책상 서랍에 도시락을 넣는 거야. 나는 점심값과 가게 지도와 주문 메뉴를 쓴 종이를 너한테 줄 테니까. 다른 사원에게는 말하기 없기야."
가타부타 입을 떼지 못하게 하는 어조는 거의 명령이다. 점심 바꾸기 놀이라는 것이 왜 '사례'인 걸까? 일이 이렇게 귀찮게 돼버린 거지. 울고 싶어졌다.
-p.13~15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앗코짱의 점심' 中

 

 

"너는 노를 못한다기보다 예스밖에 할 줄 모르는 거 아냐?"
말을 해도 거지 같은 말 밖에 할 줄 몰랐던 전 남친의 말처럼 'YES'가 유일한 처세술인 미치코는 4년 동안 사귀던 첫 애인에게 차이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파견 나온 영업 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울하게 점심 도시락을 먹으려던 미치코에게 앗코 여사가 말을 건넨다.
앗코 여사는 미치코가 파견 나온 '구름과 나무'라는 초등학생용 교재를 전문으로 하는 조그만 출판사의 유일한 여자 정사원으로 떡 벌어진 어깨에 키 173센티미터, 윤기나는 검은 단발머리를 가진 45살 독신이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앗코 여사와의 점심 바꾸기 놀이는 미치코의 생활을 점차 변화시킨다.
월요일은 외진 곳에 위치한 '카레 전문점 비스마르크'에서의 카레,
화요일은 굉장에 있는 물건 파는 왜건 중 '젤리 피시'라는 스무디 가게에서의 과일주스와 랩 샌드위치,
수요일은 '하티프나트'라는 헌책방에서 책 받아오는 심부름과 함께 '이모야'라는 가게에서 튀김덮밥,
목요일은 사무실 빌딩 옥상에서 사장님과 함께 배달 특상 초밥,
그리고 마지막인 금요일은 다시 찾은 '카레 전문점 비스마르크'에서의 일일 마스터 체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앗코 여사의 지시에 따른 미치코의 점심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조수석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앗코 씨는 운전석에서 내려 차 반대편으로 돌아 뒷문으로 왜건에 들어갔다. 잠시 후, 뚜껑 있는 발포 풀라스티렌 용기와 냅킨에 싼 플라스틱 숟가락을 들고 차에서 나왔다.
"자. 우리가 파는 건 이거야. 맛을 잘 기억해둬."
그녀가 내민 덮밥 대자 크기의 따뜻한 용기는, 두 선에 쏙 들어가는 디자인이었다. 앗코 씨는 바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일 끝난 뒤에 데리러 갈게. 꽤 힘드니까 컨디션 조절 잘해둬."
"저기, 데리러 오시는 건 몇 시쯤 어디로……."
대답 대신 앗코 씨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거친 운전으로 왜건을 후진시켜 다시 차도로 돌아갔다. 떠나는 차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커다랗게 쓴 로고를 발견했다.
'도쿄 포토푀.'
뚜껑을 여니 부드러운 김이 목을 간질였다. 맑은 수프에 큼직한 당근, 감자, 정향을 꽂은 양파, 샐러리, 돼지고기 덩어리가 가라앉아 있다. 한입 먹으니 눈이 동그래졌다. 채소와 고기를 넣고 끓였을 뿐인 간단한 요리다. 솔직히, 뭐야 포토푀야? 하고 김이 빠지긴 했다. 그러나 이 포토푀는 지금까지 경험 한 적 없는 세련된 맛이 났다. 목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뜨거운 수프는 보기보다 훨씬 진하고, 위 속에 들어가자 허브의 상쾌함이 퍼지며 지방을 씻어 내렸다. 숟가락 끝이 톱니처럼 생겨서 건더기를 으깨기 좋았다. 채소는 따끈따끈하고 달콤하고, 고기는 녹을 듯이 부드러웠다. 재료 하나하나가 뚜렷한 개성을 가지면서도 조화를 이룬 환상적인 맛. 이거라면 장사가 되겠는걸!
미치코는 벤치에 앉아 후우후우 하고 정신없이 포토푀를 먹었다. 몸 구석구석까지 따뜻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p.77~78 '일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만두고 싶다-앗코짱의 야식' 中

 

 

 

전편 사장님과의 목요일 점심에서 매출이 떨어졌다고 했지만 미치코의 '검은 고양이 이지와냐 여왕' 기획서는 어떻게 된 건지 조그만한 교재 전문 출판사인 '구름과 나무'는 도산하고 말았다.
현재 미치코는 해외 유명 홍차와 와인을 다루는 대형 무역상사인 '다카시오 물산''의 본사 영업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5개월째였다.
영업부 여자 정사원들과 파견사원들 사이에 끼여 점심이라도 편안하게 먹기 위해 추운 겨울 날씨에도 혼자 공원에서 점심을 먹던 미치코 앞에 영과 기획의 기초뿐 아니라 조깅, 독서, 자격증 공부 방법, 점심시간을 보내는 법등 사생활까지 배움을 받이 받은 구로카와 아쓰코 씨, 앗코 씨가 왜건을 타고 짠하고 나타난다.  
원래도 마찰이 있었지만 여사원들이 밸런타인데이에 돈을 모아서 남자 사원에게 '의리 초콜릿'을 주는 걸 폐지하자는 정사원들과 반대로 평소 신세 지고 있는 게 있으니 표현해야 한다는 파견사원들 사이에서 같은 파견사원들 중 우두머리 격인 사오리로부터 파견사원 대표로 초콜릿을 사 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면서 미치코의 고민이 시작된다.
한편 앗코 씨는 스무디 가게 주인인 코니 씨와 회사를 차려 각자의 왜건을 타고 다니며 '포토푀'를 파는 이동판매 일을 시작했다.
다시 한 번 앗코 씨의 곁에서 같이 일하고 싶었던 미치코는 회사를 그만두고 요리가 특기고 운전면허가 있다는 점을 어필해 퇴근 이후 일주일 동안 면접 대신 회사와 병행하며 앗코 씨의 왜건을 타고 '포토푀'를 파는 이동 판매일을  쫓아다니게 된다.  
월요일에 앗코 씨를 다시 만나고 화요일은 새벽 4시에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수요일은 새벽 2시에 대형 신문사 빌딩 앞 광장에서, 목요일은 새벽 3시 반 병원 주차장에서, 금요일은 새벽 3시에 쓰키지 시장에서, 토요일은 야외 영화 촬영지까지 정신없이 따뜻하고 맛있는 '포토푀'를 담아 다양한 사람들에게 판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있는 월요일.
미치코는 일주일 동안 앗코 씨와 다니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가운데 자신만의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기로 한다.

 

파견사원인 미치코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주인공은 왠지 앗코 씨 같다.
언뜻 보면 말이 거칠고 츤츤거리고 미치코의 고민을 속 시원하게 들어준다던가 조언을 해주지 않는다.
그저 미치코에게 여러 길을 열어주고 직접 경험하게 하여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앗코짱의 점심'과 '일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만두고 싶다-앗코짱의 야식' 두 편 말고도 다른 등장인물들이 메인으로 나오는 '밤거리의 추격자'와 '여유 넘치는 비어 가든'도 잔잔하니 마음 따뜻하게 읽을 수 있었다.

 

                                                                     

'밤거리의 추격자'에서 세이메이라는 '규수'학교에 다녔지만 온몸으로 그걸 반항하며 십 대를 보낸 미쓰시마 노유리는 삼십 살이 되면서 결혼을 고민하며 매주 영혼 없는 소개팅을 나간다.
학창 시절 반항아 노유리를 잡으러 다니던 은사 '귀신 조노 샘'인 마에조노 선생님과 마주치게 된다.
나이를 먹은 노유리 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조노 선생님은 이번에도 길거리를 방황하다 선생님을 피해 가게에 숨어 들어온 세이메이 학생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조노 샘과 함께 하마자키를 잡으러 유흥거리를 뛰어다니는 노유리의 일탈이 꽤 즐거웠다.


'여유 넘치는 비어 가든'에서는 종합 IT상사인 '센터 빌리지'의 사장인 도요다 마사유키와 창사 이후 가장 써먹을 데 없는 사원이라 불리는 사사키 레미의 이야기이다.
의욕과 긍정 마인드는 넘치지만 일머리는 영 꽝인 레미는 갖가지 실수담으로 결국 사표를 내고 그만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빌리지'가 있는 스가누마 빌딩의 죽은 건물주의 유언으로 빌딩 옥상을 인계받은 레미는 그곳에 비어 가든을 오픈하게 되면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업무시간에 친하게 지내던 수위 할아버지가 빌딩 주인이라는 마사유키의 표현대로 무슨 할리우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벌어진 것이다.
처음에 비이냥 거리던 사람들도 점차 레미의 무한 파워에 점차 옥상에 위치한 비어 가든에 발걸음을 하게 되고 침체되어 고여있던 사람들이 점차 변해가면서 끝까지 옹고집으로 버티던 마사유키마저도 레미 파워에 항복을 외치게 된다. 

 

 

비록 나머지 두 편은 미치코는 나오지 않고 앗코 씨도 아주 잠깐 엑스트라처럼 나왔다 사라지지만 어느 부분에서 앗코 씨가 등장할지를 기대하게 된다.
일을 하다 보면, 직장에 다니다 보면 가끔 배터리가 나간다는 표현에 수긍하게 된다. 
업무 때문에 나갈 때도 있고 사람 때문에 나갈 때도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 때문에 나갈 때가 많다.
내 체력과 스트레스를 월급과 맞바꾸는 기분이랄까.
이래서 어른들이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고, 밥 벌이해 먹고사는 게 힘든다고 하셨나 보다.
아침에 눈을 떠 출근할 때마다 오늘 하루 무탈하게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지나가길 바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사회 초년생 때 앗코 씨 같은 상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소설  속 이야기임에도 미치코가 부러웠다.
일한 날들보다 아직 일해야 하는 날들이 더 많이 남았기에 나에게도 앗코 씨 같은 상사가, 적어도 인연이 생겼으면 좋겠다.
후속작으로 [3시의 앗코짱]과 [간사 앗코짱]이 있다는데 이 책들도 얼른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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