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앨런 그린스펀.에이드리언 울드리지 지음, 김태훈 옮김, 장경덕 감수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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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파괴의 대서사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누렸던 미국, 지금도 자본주의의 선두주자인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알아보자.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비록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지만 말이다. 회의가 대두되고 있지만 대안이 없는 지금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아직 다른 경제체제에 져본 적이 없다. 스스로 자멸할 것이라 예견했던 마르크스의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성숙한 자본주의로 나아가기를 바랐던 슘페터의 바람 역시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예견들이 빗나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우선 알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인류의 가장 큰 전쟁이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공황에서 목격할 수 있다. 미국은 다른 국가들보다 산업혁명을 경험한 좋은 아버지(영국)를 만난 덕분에 자본주의의 본산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한 세계 대전이 벌어진 유럽대륙으로부터 3,800km나 떨어져 있어서 전쟁의 폐허를 비교적 피할 수 있었다. 폭격기와 함대가 오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덕분에 미국은 전쟁에 참전했지만 본토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후에는 세계에 필요자원을 판매하는 수출국이 되었다. 그 덕분에 전후 다른 국가들은 일어설 때 미국은 거인에 빗댈만한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공황은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매력은 경제성장률이라는 수치로 표현된다. 그렇지만 파이가 커지는 속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진정한 창조적 파괴없이는 거품만 부풀어 오른다. 그 결과 여러 버블이 꺼지는 역사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찾아오는 공황은 많은 피해를 불러왔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 자본주의의 매력에 빠져든다. 꺼진 만큼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 공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자본주의가 완벽한 경제체제라고 말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파이가 계속 커질 것이라 기대할 수는 있다. 문제는 파이가 커지는 속도보다 사람의 탐욕의 크기가 훨씬 빠르게 부푼다는 점이다. 그래서 슘페터는 성숙한 자본주의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는 자멸할 것이라 예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비록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돈이 무조건 좋다는 식의 관점은 나이브nive하다. 반대로 돈은 필요 없다는 식의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현재, 지금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를 배격한 사회에 대한 해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맹신하는 것도, 반대로 자본주의를 나쁘다고만 바라보는 것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자본주의의 한계가 도래했다고 말하기 또한 어렵다.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도전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현시대의 경제체제가 아닌가.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단지 미국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살펴보길 원한다.

우리나라는 빠른 시간 내에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다른 나라에서 코리아 드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땅을 밟는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아메리칸 드림이 우리의 단어였는데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어 코리아 드림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의 길을 먼저 걸어간, 그리고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잘 정착된 미국의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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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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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없이 치료는 불가능하다.

현상을 알아야 소망을 얘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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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정치학 - 기독교 세계 이후 교회의 형성과 실천
스탠리 하우워어스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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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없이 치료는 불가능하다.

현상을 알아야 소망을 얘기할 수 있다.

 

 

'증언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명제와

'우리는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이며,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정치학(, politics)이란 사회과학(, social science)의 한 분야로서 정치 또는 정치현상을 그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정치학이란 개념을 정의하기에 앞서 정치 또는 정치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치 또는 정치현상은 인간사회에서 발생된다.

 

 

정치학이란, 정의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현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의 정치학은 이런 정의에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우리는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뭔가 권모술수를 쓰고 당파를 짓는 것을 연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의에서 언급하듯이, 교회의 정치학을 통해 현재 교회의 현상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살펴보아야 비로소 다음을 논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의 건강함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다소 있을 수 있겠지만, 모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질문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현상을 파악함으로써 다음을 논할 수 있다. 정확한 진단 없이는 치료는 불가능하다.

 

 

우선 신학에 관한 전공지식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 책은 어렵게 느껴진다. 단어들의 낯섦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개인적으로 모를 법한 단어들에 대한 용어정리가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책이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만을 위해 쓰인 책이라기 보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신앙서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러하다. 생각이 틀렸을지라도, 일반 독자들에게 '어렵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생각하게 만드는 이러한 책은 신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읽을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독교의 변화는 신학자들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움직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사실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크리스텐뎀》이라는 책과 함께 읽으면 좋다. 목차들만 살펴봐도 이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는 내용들임을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책이니 만큼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면서 궁금했던 용어들과 좀 더 이해가 필요한 부분에서 내용들이 있어서 《교회의 정치학》을 함께 읽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추천사를 읽고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공유하자면 아래와 같다.

당신이 촛불을 밝히든 태극기를 흔들든 그 사이에 끼여 있든, 하우어워스는 당신을 불태우고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하우어워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실과 결탁하기보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불어넣는다. 복음의 증인이 되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은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극히 내면화되었다. 사회적 책임과 역사적 사명은 외면한 채, 각자 입맛에 따라 정치나 여론에 편승하는 모습이다. 하우어워스는 복음이 곧 인간과 인류 역사에 허락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에게 진정한 자유이자 명예이다. 바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성찰은 책임 있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추천사 中>

 

 

기독교는 언어의 힘을 잃어버렸다. 너무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언어를 남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경건하게 보이는 척도라고 착각한다. 성경적 언어의 나열은 거북하다. 언어에 생명이 없이 때문이다. 수식어로 전락한 어휘들은 익숙한 단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뢰를 주지 못한다.

소용되는 데는 덕을 세우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며, 진정한 관계를 위해 서술되어야 한다. 잊어버린 맥락을 다시금 회복해야 한다. 잃어버린 힘의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교회는 신실한가? 그렇다면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스스로 없애야 한다. 그러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분은 교회를 오히려 고립시킨다. 왜냐하면 '세상'이라 불리는 사회 안에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교회 안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교회에서만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르침은 교회를 위한 내용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말씀들로 충만하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부름받은 공동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정체성이 수식어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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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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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은 변론, 듣지 않은 변론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듣는 변론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책을 읽고 딱 떠오른 가사.

 

우선 책에 읽을 거리가 많아서 좋았다. 본문 밑에 주석이 각각 실려 있어서 읽는데 편했다. 주석이 뒤에 따로 모아져 있는 책들이 있는데, 정말 불편하다. 책장을 넘겼다 확인했다 하는 반복이 귀찮기 때문이다. 또한 읽는 흐름 역시 끊긴다. 그런데 이 책은 본문 밑에 바로 주석이 실려 있어서 읽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물론 이해는 다 못하지만, 찾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각 장에 들어갈 때,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관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A) 소크라테스의 1차, 2차 변론을 담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B) 크리톤, (C) 파이돈, (D) 향연, (E) 해제, (F) 연표로 구성되어 있다.

책의 구성은 본문인 소크라테스의 변명부터 크리톤, 파이돈, 향연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에 해제와 연표가 있다. 예전에 다른 책으로 한 번 읽었던 기억이 있어 처음부터 쭉 읽었다. 그러나 추천하기는 해제를 읽고 연표를 본 다음에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책을 읽고 소크라테스는 평소에도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자신만의 원칙이 있었음을 『크리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리톤이라는 친구가 소크라테스를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탈옥시킬 수 있음을 말하며 탈옥을 권한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선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삶의 원칙이 있었고, 평소에 자신만의 생각들이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게 선택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파이돈』에서는 죽음 앞에서 여러 사람들(p.92中)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있던 그들에게 묘한 감정이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향연』은 이해가 잘 되지 않으나, '에로스(사랑)'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구나를 발견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단순히 좋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대화는 심오하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현 시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할까?' 였다. 에로스(사랑)에 대한 깊고 다양한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면서, 현 시대의 사랑은 그에 비해 '진짜 사랑에 대해 알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아이러니 하게도, 판결은 소크라테스의 표현을 현실화 시켰다. '죽으나 죽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완성시킨 것은 재판을 통한 사형 선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들은 스크라테스를 육체적으로 죽였지만, 그의 정신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실이 되게 만든 것이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자연사 했다면 이런 대화가 남겨졌을까,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고찰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 싶다. 

 

사실, 1차 변론인 아래 내용만 살펴봐도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압도적인 우승이다. 고발한 사람에게는 모순이 많으며 고발을 위한 꼬투리 잡기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결론을 알듯이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고발 당한 소크라테스. 그들이 말하는 타락은 도시의 신들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청년들을 진정으로 타락하게 만든 것은 재판 결과였다. 환멸을 느낀 것이다. 그로 인해, 많은 청년들이 아테네를 떠났다. 그 중 대표적이 인물이 바로, 이 책의 저자 '플라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크라테스의 육신은 죽였으나, 그의 정신은 죽이지 못했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분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선고를 했지만, 결국 그 사형 선고는 아테네의 철학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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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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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듣는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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