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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심플하면서도 강렬한 책제목에 끌려 구입했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막상 받아보니 너무 작고 너무 얇다. 판형 자체도 문고판 사이즈인데다, 앞뒤 우수리 떼고 순전히 본문만 본다면 80쪽도 채 되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단행본의 한 챕터 정도밖에 안될 분량인데... 본전 생각이 심히 나는 부분이다. 허나 짧은 책이긴 해도 담겨 있는 내용은 꽤 단단하다.

 

전통적인 윤리학에서 '자유의지'는 특정 행위의 윤리적 책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관건이 되는 개념이다.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에 대해선 윤리적 책임을 묻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면상태에서 이루어진 살인이라든지, 타인의 협박에 의해 못 이겨 저지른 도둑질에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어느 정도 법적 책임을 지우긴 하겠지만 본의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행위라는 점이 참작되어 처벌의 수위나 비난의 정도가 감소하는 건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주취폭력을 관대하게 대하는 관행 또한 이런 사고방식의 괴상한 변주다. 술 취해서 그런건데, 제 정신이 아니었잖아, 좀 봐주지 뭐. 이런 관대함의 저변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라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자유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얼핏 듣기에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고, 많은 경우 어떤 압력도 없이 자신의 의사대로 행위를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오늘 점심으로 중식을 먹을지 일식을 먹을지 내 맘대로 결정하고, 중식을 먹기로 했다면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아예 식사를 굶을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전적으로 내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논리로 그러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걸까? 그에 따르면, 나는 애당초 왜 일식집이 아니라 하필 중식집을 선택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중국음식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갑자기 왜 중식을 먹고 싶어했던 거지? 중식을 먹고 싶은 의지는 도대체 왜 생겨났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그냥 내 안의 어떤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중식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나는 자유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했다고 믿지만, 왜 그러한 욕망이 생겨났는지,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그 결정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의지도 들어있지 않다. 그저 '내 안의 어떤 것'이 시킨 일에 대해 나의 생각이 기계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나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착각한다.

 

흔히 자유의지를 정당화하는 논거 중의 하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중식을 먹으라는 '내 안의 어떤 것'의 명령에 저항하여 일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경우 역시, 왜 굳이 그렇게 저항하려는 생각이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어제 점심메뉴를 고를 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다가 왜 오늘 점심에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을까? 나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따름이다. 결국 궁극적인 원인을 소급해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종적인 대답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왜 짜장면이 먹고 싶었어? 그냥.  왜 짜장면이 먹고 싶은데도 일부러 일식집에 갔어? 그냥.

 

저자는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은 '공상'이자 '착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원인에 의해 휘둘리는 꼭두각시일 따름이다. 우리는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을 굉장한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먹고 싶다"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부터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우리의 욕망은 생존을 갈망하는 신체가 보내는 신호에 반응한 것 뿐이다. 거기에 어떤 자유가 있는가?

 

사람의 몸을 들여다 보면 심장은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박동하고, 췌장 역시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인슐린을 분비한다. 그것들은 또한 언제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자신의 기능을 멈추어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의 신체에는 의지가 관철되지 못하는 생리기관이 있다. 저자인 샘 해리스에 따르면 인간의 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고 욕망하는 것들은 뇌의 생리 작용에 좌우된다. 행위자로서 인간은 자신의 뇌를 통제하지 못한다. 사실은 그 자신이 뇌의 통제를 받고 있을 뿐인데 스스로 뇌의 주인이라고 착각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뇌는 누가 통제하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의지와 욕망의 기원은 당췌 알 수 없는 불가사의에 휩싸인다.

 

이런 류의 이야기가 사실 새롭지는 않다. 내게는 이 책의 주장이 '이기적 유전자'론의 철학적 버전처럼 들린다. 아마도 도킨스라면 '뇌를 통제하는 주인'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라고 답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샘 해리스의 주장은 철학적 회의주의가 최신 뇌과학의 성과와 결합하여 보강된 이론인데, 이것이 철학사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혹시 이 책에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철학적 논거가 등장할까 기대했으나 딱히 기대에 부응할만큼 참신하진 않다. 그렇지만 참신성의 여부를 떠나서 이 논변 자체는 상당히 강력하다. 반박하기가 쉽지 않은 논변이다.

 

이 짧은 책에서 그나마 신선하게 느껴지는 대목은 '자유의지를 부정할 때 행위의 윤리적 책임은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에 대한 저자의 답변이다. 어찌 보면 핵심은 이 부분이다. 만약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꼭두각시처럼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라면, 강간 연쇄살인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운 나쁘게 질이 안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서 범죄자가 되어버린 그들에겐 어떤 도덕적 책임이 있는가?

 

결론만 말하자면 샘 해리스의 답변은 "그들의 윤리적 책임은 묻지 말고, 그들의 행위를 재난방재와 같은 개념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풍이나 쓰나미 같은 천재지변에 윤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에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범죄자들 역시 일종의 재난과 마찬가지다.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다만 그들이 사회에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사법제도가 존재해야 한다. 다만 이 때 형법이 수행하는 역할은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개념보다는, 사회적 안전확보를 위한 '방재(防災)'에 가깝다. 범죄자는 '징계대상'이라기보다는 '관리대상'이다. 이 또한 아주 새로운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강력하다. 나아가 범죄에 대한 '보복'이라는 관념으로써 형벌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대목은 사뭇 진보적이기까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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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쌍의 엘리트 부부가 중년-노년의 나이에 산 좋고 물 맑은 산골마을로 이주하여 헌책방 주인으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민속학을 연구한 박사이자 이야기 구연가인 웬디 월치, 그리고 대학교수이자 발라드 가수였던 그녀의 스코티쉬 남편 잭의 이야기다. 스무 살의 나이차로 결혼한 두 사람은 "각각 살아본 나라는 여덟 개, 가본 나라는 마흔 개나 됐으나" 남편의 황혼기에 즈음해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탄광마을 빅스톤갭에 정착한다. 발단은 저자 스스로 "독사 굴"이라고 부르던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데, 사업경험도 전무한데다 텃새 심한 시골동네에서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책방을 경영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그렇지만 잭과 웬디 부부는 특유의 친화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사업을 키우고 사람들과 우정을 일구어가며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간다.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은 기분 좋아지는 따뜻하고 흐뭇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 원작이 유머러스한데다 한국어의 말맛을 살리려 애쓴 번역 덕분에 (다소 과감한 의역을 마다 않은 듯한 느낌도 살짝 들긴 하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였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의 플롯은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귀향' 환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이를테면 도시를 떠나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은 이들의 공동체, 혹은 잘 나가는 전문직을 버리고 제주도에 내려가 게스트 하우스나 카페를 연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는 심심찮게 들어왔다. 이 책도 크게 보면 그런 맥락에서 읽혀진다. 도시의 생활전선은 누구에게나 '독사 굴'이고,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온정이 넘치는 삶을 꿈꾸는 건 모든 도시민의 로망일 터이다. 더욱이 이 주인공들의 삶은 한국적 상황에선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부러운 면모가 있어서 다분히 '남의 나라' 환타지를 자극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엔 세계를 유랑하듯 자유롭게 살고, 나이 들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커뮤니티에서 자그마한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고, 또 수월치는 않았다 해도 어쨌든 풍광좋은 마을에 정착하여 창업에 성공한 부부의 이야기라니. 잘 사는 나라의 엘리트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 슬쩍 질시의 감정마저 든다.

 

그런데 다소 뻔해질 수도 있었을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이야기가 작은 책방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책에 푹 빠진 애서가들 치고 어린 시절 동네 책방에 얽힌 추억이 없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혹은 장래의 직업으로 책방주인을 꿈꿔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네 책방이란 잊을 수 없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동네 책방이 하나둘 자취를 감춰버린 지금 우리는 모두 실향민 신세가 되었다. 여전히 온라인 대형서점에서 책을 사고 읽지만, 동네 책방에 들어설 때 느껴지던 밀폐된 공간의 책냄새와 두근거림, 주인 아저씨 혹은 아줌마와의 살가운 인사, 구입한 책에 꽂아주던 서점 전화번호가 찍힌 책갈피는 아련한 옛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나마 남아 있는 동네 서점이라봐야 초중생 학습서와 성경책이 독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시에서 시골로' 못지 않게 '온라인서점에서 동네 책방으로' 라는 또 하나의 귀향 모티브를 품고 있다. 동네 책방이야말로 애서가들의 잃어버린 고향, 돌아가고픈 망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연고도 없이 산골에 뛰어든 이방인들이 좌충우돌하며 책방을 일구어간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연이 책과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애서가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다. 내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 책방에 정기적으로 들렀던 기억, 주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책값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가 턱턱 책을 사주시던 기억, 또 대학생 시절 학교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들던 빨간 책(!)들을 소개받던 기억이 소중하게 남아 있다. 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서가에 꽃힌 수많은 책들이 나를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예기치 못한 만남과 새로운 앎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있는 곳. 다른 이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애서가들끼리의 은밀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곳.  책에 대한 독서의 기억과는 별개로 책방에 대한 체류의 기억은 보다 시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이 퇴색해 버렸지만 이 책을 읽노라니 오래 된 그 소년시절, 청년시절의 추억이 찌릿하게 되살아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에서 그런 감정의 연대를 느낄 것이다.  

 

동네 책방, 헌 책방에서 책을 뒤적거려본 경험의 유무는 한 사람의 일평생 독서체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운이 좋아 나는 사라져가는 지난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글자도 익히기 전에 스마트폰에 먼저 익숙해지는 세대에게 책과 책방이란 과연 무엇일까? 온라인 거대서점에 이어 전자책 단말기의 등장으로 동네 책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존속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문자 전달 매체로서 책은 어떻게든 전승되어가겠지만, 동네 책방이라는 3차원 공간의 운명은 그보다 가혹하다. 웬디 웰치는 온라인 서점이 대형오프라인 서점을 무너뜨렸지만, 소규모의 중고 서점은 오히려 지역공동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재활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하는 상황과 논리가 과연 한국의 도서 유통시장에서도 그대로 재연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본 것은 과연 애서가들의 노스탤지어일까 아니면 유토피아일까. 길모퉁이의 작은 책방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가 될 수도 있을까?  만약 한국에서도런 책과 책방을 통한 교류와 우정의 공동체가 싹틀 수 있다면 그보다 분명한 희망의 증거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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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스톤갭의 작은 책방 - 우정, 공동체, 그리고 좋은 책을 발견하는 드문 기쁨에 관하여
웬디 웰치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사랑하고 책방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애서가들이 꿈꾸는 노스탤지어와 유토피아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책세상은 바로 이런 책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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