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쌍의 엘리트 부부가 중년-노년의 나이에 산 좋고 물 맑은 산골마을로 이주하여 헌책방 주인으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민속학을 연구한 박사이자 이야기 구연가인 웬디 월치, 그리고 대학교수이자 발라드 가수였던 그녀의 스코티쉬 남편 잭의 이야기다. 스무 살의 나이차로 결혼한 두 사람은 "각각 살아본 나라는 여덟 개, 가본 나라는 마흔 개나 됐으나" 남편의 황혼기에 즈음해 애팔래치아 산맥의 작은 탄광마을 빅스톤갭에 정착한다. 발단은 저자 스스로 "독사 굴"이라고 부르던 도시에서의 직장생활을 더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인데, 사업경험도 전무한데다 텃새 심한 시골동네에서 사양산업이 되어버린 책방을 경영하는 일은 녹록치 않다. 그렇지만 잭과 웬디 부부는 특유의 친화력과 수완을 발휘하여 사업을 키우고 사람들과 우정을 일구어가며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리잡아간다.

 

<빅스톤갭의 작은 책방>은 기분 좋아지는 따뜻하고 흐뭇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 원작이 유머러스한데다 한국어의 말맛을 살리려 애쓴 번역 덕분에 (다소 과감한 의역을 마다 않은 듯한 느낌도 살짝 들긴 하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독서였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의 플롯은 우리에게 제법 익숙한 '귀향' 환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이를테면 도시를 떠나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은 이들의 공동체, 혹은 잘 나가는 전문직을 버리고 제주도에 내려가 게스트 하우스나 카페를 연 사람들의 사연을 우리는 심심찮게 들어왔다. 이 책도 크게 보면 그런 맥락에서 읽혀진다. 도시의 생활전선은 누구에게나 '독사 굴'이고, 그곳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온정이 넘치는 삶을 꿈꾸는 건 모든 도시민의 로망일 터이다. 더욱이 이 주인공들의 삶은 한국적 상황에선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부러운 면모가 있어서 다분히 '남의 나라' 환타지를 자극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엔 세계를 유랑하듯 자유롭게 살고, 나이 들어서도 마음만 먹으면 커뮤니티에서 자그마한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고, 또 수월치는 않았다 해도 어쨌든 풍광좋은 마을에 정착하여 창업에 성공한 부부의 이야기라니. 잘 사는 나라의 엘리트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 슬쩍 질시의 감정마저 든다.

 

그런데 다소 뻔해질 수도 있었을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건, 이야기가 작은 책방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책에 푹 빠진 애서가들 치고 어린 시절 동네 책방에 얽힌 추억이 없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혹은 장래의 직업으로 책방주인을 꿈꿔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네 책방이란 잊을 수 없는 고향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동네 책방이 하나둘 자취를 감춰버린 지금 우리는 모두 실향민 신세가 되었다. 여전히 온라인 대형서점에서 책을 사고 읽지만, 동네 책방에 들어설 때 느껴지던 밀폐된 공간의 책냄새와 두근거림, 주인 아저씨 혹은 아줌마와의 살가운 인사, 구입한 책에 꽂아주던 서점 전화번호가 찍힌 책갈피는 아련한 옛추억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그나마 남아 있는 동네 서점이라봐야 초중생 학습서와 성경책이 독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도시에서 시골로' 못지 않게 '온라인서점에서 동네 책방으로' 라는 또 하나의 귀향 모티브를 품고 있다. 동네 책방이야말로 애서가들의 잃어버린 고향, 돌아가고픈 망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연고도 없이 산골에 뛰어든 이방인들이 좌충우돌하며 책방을 일구어간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연이 책과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애서가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선사한다. 내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 책방에 정기적으로 들렀던 기억, 주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책값을 아끼지 않던 아버지가 턱턱 책을 사주시던 기억, 또 대학생 시절 학교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들던 빨간 책(!)들을 소개받던 기억이 소중하게 남아 있다. 책방은 그런 곳이었다. 서가에 꽃힌 수많은 책들이 나를 읽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예기치 못한 만남과 새로운 앎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있는 곳. 다른 이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애서가들끼리의 은밀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곳.  책에 대한 독서의 기억과는 별개로 책방에 대한 체류의 기억은 보다 시공간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이 퇴색해 버렸지만 이 책을 읽노라니 오래 된 그 소년시절, 청년시절의 추억이 찌릿하게 되살아난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책에서 그런 감정의 연대를 느낄 것이다.  

 

동네 책방, 헌 책방에서 책을 뒤적거려본 경험의 유무는 한 사람의 일평생 독서체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운이 좋아 나는 사라져가는 지난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글자도 익히기 전에 스마트폰에 먼저 익숙해지는 세대에게 책과 책방이란 과연 무엇일까? 온라인 거대서점에 이어 전자책 단말기의 등장으로 동네 책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존속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가 많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문자 전달 매체로서 책은 어떻게든 전승되어가겠지만, 동네 책방이라는 3차원 공간의 운명은 그보다 가혹하다. 웬디 웰치는 온라인 서점이 대형오프라인 서점을 무너뜨렸지만, 소규모의 중고 서점은 오히려 지역공동체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재활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하는 상황과 논리가 과연 한국의 도서 유통시장에서도 그대로 재연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본 것은 과연 애서가들의 노스탤지어일까 아니면 유토피아일까. 길모퉁이의 작은 책방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가 될 수도 있을까?  만약 한국에서도런 책과 책방을 통한 교류와 우정의 공동체가 싹틀 수 있다면 그보다 분명한 희망의 증거는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