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낚시통신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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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대녕 작가의 첫 책을 찾아 읽었다. 94년도에 나온 책이라고 하는데 워낙에 점잖고 뭐랄까 좀 고전적인 문체를 쓰는 작가라 그런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느낌이다. 하긴 94년도면 벌써 22년 전이구나. 가끔 연도를 가늠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러 버렸을까.....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이런 한국말의 예스러운 말투와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떠올리면 낭만적이고 설레기까지 한다. 내가 있는 곳과 같은 장소, 그러나 다른 시간 속에서 비슷한 듯 전혀 다른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는 일이 즐겁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야 지금과 다를바 없었을테지만 밖으로 표출되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고, 그 약간의 벌어진 틈새를 들여다 보는 것이 재밌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을 때도 설레고 좋았다. 


 10개의 단편이 묶여 있는 두툼한 두께의 소설집인데 사라진 것(혹은 사람)이나 알 수 없는 것(혹은 사람)을 찾아 다니는 이야기가 많다. 와중에 남과 여 사이에 일어나는 모종의 사건이나 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이것을 로맨스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니면 남자가 생각하는 로맨스란 이런 것인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여자들은 저마다의 비밀을 몸 속에 품고 그를 찾아와 유혹한다. 남자는 여자를 받아주지만 끝끝내 이해에 닿을 수는 없고, 여자는 어떠한 대답도 남기지 않고 한순간 사라져 버린다. 관계 속에서 여자들은 머무는 힘과 떠나는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반면, 남자는 수동적인 느낌이 강하고 또 여성의 유혹에 약하다! 남자가 쓴 연애 소설이란 무척 흥미롭구나.


 "어려서 한때 경주에서 살았는데 가끔 버스를 타고 동해삼척까지 갔다가 도로 내려오곤 했어요. 별 볼일도 없이 말예요. 동해삼척에서 포항까진 바닷길이라서 정말 근사하잖아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지 싶어요. 하지만 울진 왕피천에 은어가 산다는 얘긴 처음 듣네요. 아무튼 마음이 힘들 때마다 그 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던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다음, 혼자 왕피천으로 은어낚시를 가게 되면 나 또한 그 바닷길이 좋아 경주까지 내려가곤 하지 않았던가. 물론 경주에 가면 석굴암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이긴 했다. 나는 반가운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젠가 서로 비껴 지나갔거나 혹은 같은 버스를 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말인가 하여 그녀가 뜨악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그렇고 그렇다는 얘기를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우린 정말 근사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네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애달프고 그리운 생각들이 몰려왔다. 나는 바닷길을 함께 회유하고 있는 그녀와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얼른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 끝으로 한참이나 모래를 매만지고 있었다. 한동안 나는 은어 생각에 빠져 있었던가.
 그러고 나서 예기치 않게도 폭음을 하고 난 아침처럼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증류상태가 찾아왔다. 나는 갑작스레 텅 빈 상태가 되어 무릎에 턱을 괸 채 바다 위에서 출렁대고 있는 달빛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갔던가.
 문득, 그녀의 손이 내 어깨 위로 슬그머니 올라왔다. 마치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듯이.
 그녀와 나는 서툴고 기묘한 몸짓으로, 서로를 차단하고 있는 투명한 공간을 서먹하게 거역하면서, 마침내 상대의 차가운 입술에 지친 듯 입술을 갖다댔다. 순간 나는 때로는 그리움이 정욕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녀가 모르게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그 기이한 깨달음의 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아이처럼 내 품에 안겼다. 돌연한 일이라서 나는 잠시 멍한 상태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가 내 목을 힘주어 끌어안고 안아줘요, 하면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유채꽃의 바다에서 그녀와 나는 아무 뉘우침도 약속도 없이 급기야는 하나가 되어 달빛이 끄는 대로 조수처럼 떠내려갔다.

- 「은어낚시통신」 p.87-88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물을 사이도 없이 앞뒷문 차 유리가 스스스 내려앉으며, 바다같이 무엄하게 넘실대는 배꽃의 무리가 창졸간에 차 안으로 쏴아 하고 밀려들었다. 순간 나는, 아아 하고 흐느끼는 자경의 밭은 입엣소리를 듣고 있었던가. 황톳빛 선연한 낮은 둔덕을 따라 수만의 배꽃들이 초경의 봄비 속에서 히히덕거리며 우리를 넘보고 있었다. 그때쯤 해선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야말로 배꽃 천지였다. 자경의 얼굴은 다시금 가부키 배우처럼 변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무섭다, 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기 시작한건 확실히 그때 배꽃을 본 때문이었다.
일요일 밤에 결혼한 신부들이 길에서 비를 맞고 있어요. 새들이 차를 잡고 있어요. 날이 어둬져요! 남천이 떠나가고 있어요!
해남 친구가 앗, 하며 앞에서 달려오는 차를 피하기 위해 급히 핸들을 우로 꺾었다. 황톳물이 차 안으로 끈적하게 튀어들어 왔다.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백미러로 자경을 훔쳐 보았다.
길은 길을 물고 이어져 끝 간 데가 없었다.

- 「국화 옆에서」 p.212

"서형, 학교 다닐 때 운동권였소?"
그 말투 속에는, 나도 그때는 돌멩이 깨나 던졌더랬소, 라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그 빈정거림이란 자조적이기에 앞서 자괴적으로 들렸고 자괴적이기에 앞서 숨긴 상처를 들춰낸 자에 대한 분노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이미 타협했지 않은가. 명함과 양복과, 구두와, 은행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과, 최저생계비와, 예금통장과 기타 가정이라는 또 하나의 질서체계에서 가장의 권위를 부여받는 대신 일찌감치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도장을 찍은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민자당이 어떻고, 국가보안법이 어떻고, 광주가 어떻고, 대학생 문신이 어떻다고 떠들다니 가증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백 번 실수했다. 남기수에게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하리라.
"서형, 아직도 우리가 민주국가의 시민이긴 한 겁니까?"
어느 순간,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남기수가 내게 물었다. 나는 자신없는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내 목소리엔 조금의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독재국가의 청맹과니들입니다."
"그렇군요...... 역시."
그가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택시는 길음동, 길음동 부근 미아리 텍사스에 우리를 부려놓고 왔던 길을 횅하니 되돌아갔다. 우리는 막차를 놓친 사람들마냥 택시가 사라져간 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남기수와 나는 서로의 눈을 피하며 길 한복판에서 엉거주춤 서 있다가 길옆 간이 포장마차로 다가갔다. 그곳은 육탐을 못 이긴 자들이 찾아와, 행사를 치르기 전후에 빈속을 채우고 가는 축생의 여물통이었다. 남기수와 나는 거기서 사발면 한 그릇씩을 정말 축생처럼 먹었다. 우리의 속은 춥게 비어 있었다.

-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p.335-336

 

 춘천 청평사, 부여 무량사, 제주도 성산포, 땅끝 해남을 비롯해 서울의 미아리, 종로, 광화문, 황학동 등등 열 개의 단편 안에 정말 다양한 장소들이 등장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우리나라 곳곳의 배경을 읽고 있으면,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 94년의 그 곳으로 가고 싶다.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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