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적는다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4
혜경궁 홍씨 지음, 이선형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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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여지도 없이 한중록의 '한'자는 '한스러운 恨'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역시도 동시대의, 또는 후대 사람들이 지레짐작하는 고통일 뿐이고
그 추측마저 빗나감으로써 실은 대놓고 '한스럽다'고 표현하지도 못한
형용불가와
형용금지의 가슴 미어지는 고통은 짐작조차 어려울 것이다.

필부라 하더라도 죄인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지옥이겠는가.
하물며 절대권력이자 근친으로부터 참형을 당한 왕세자 아내로써의 여생이란
궁 안에서 숨쉬는 자체가 연좌제 처벌이며 무기징역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남편을 처단했던 권력과 법의 기준은 더욱 공고하고 자명해져서
그녀의 아들은 삼촌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고 그 명분으로 왕이 된다.
아비 주검에 같이 난도질을 해서야만 왕이 될 수 있었던 아들의 비극이
그런 지아비와 친아들을 동시에 바라봐야 했던 어미의 비극에 비할까.

하지만 내게 이 비통한 시절 중 가장 비극적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굶어죽은 왕자나 아비잃은 아들도, 그 어미나 친자를 처단한 왕도 아닌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를 주목하고 싶다.

중력이나 만유인력도 무색할 절대왕권만이 불규칙적, 주관적으로 지배하는
철옹성 궁 안으로 어린 딸을 시집보내야하는 비극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사위가 살기를 내뿜으며 미쳐가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봐야했던 비극,
편집증적 왕이 친자이자 자신의 사위를 살해하는 정치에 동의했던 비극,
유일한 손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혈연을 부정하고야 겨우 왕이 됐던 비극,
그리고 세태의 중심에서 정치가로, 반역자로 추대와 멸시를 모두 받았던 비극.
이 모든 것들이 죽음을 명받지 못한 자신의 딸 때문에 겪은 오욕이라 생각하니
딸로써, 아비를 둔 사람으로써 가슴이 막혀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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