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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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고치를 져 나르던 허삼관이 내 안의 힘이오, 온기이자 생명인 피를
돈 받고 뽑아 팔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 값은 월급처럼 쥐꼬리만 하지도 않았고,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장갑처럼
어떤 때는 좋은 가는 실인지, 어떤 때는 나쁜 굵은 실인지 알 수 없지 않았다.

허삼관을 첫 핏값을 가정을 이루는데 쓴다.
'꽈배기 서시' 허옥란에게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고
잘 알지도 못한 친척들까지 불러모아 결혼식을 치른다.
온전히 그의 힘으로, 그의 온기로, 그의 생명으로 만든 돈이다.

몸 속 돈나무가 자라는 한 그는 구차할 것이 없다.
누구에게 궁색할 것도, 인색할 것도 없이 당당하다.
지붕엔 비가 새어도 수리할 사다리가 있고, 도와줄 세 아들도 있다.
조금 그악스럽긴 해도 예쁘고 살림 잘하는 아내가 낳아준 세 아들.

어느 날 그는 첫 번째 피의 배신을 겪게 된다.
커가면서 점점 하소용을 닮아가는 장남 일락이가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것.
아무리 패악을 부리고 따귀를 때리고 무정히 내쳐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두 번째 배신은, 마치 장남처럼 들어온 내 몸 속의 남의 피다.
공산당이 부뚜막을 깨고 쌀과 설탕 간장을 다 가져가도
내 몸의 피만큼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잦은 매혈로 사경을 헤매게 됐을 때 그는 수혈을 받게 된다.
도로 뽑아 가라는 절규에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참하다.

세 번째 배신은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와 가족을 지켜낸 힘이었고 밥이었던 그의 피는 이제 늙어 쓸모가 없다.
세 아들을 출가시키고 얼마 간의 돈은 언제든지 호주머니 있는 그이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운다.

가뭄과 홍수, 가난과 병마, 이데올로기와 몰락 속에서도 자신과 가족을 지켜냈던 피다.
자라대가리라는 욕을 먹고도, 돼지새끼에 기대 언발을 녹여야 했을 때도
승리반점 테이블을 호기롭게 탕탕칠 수 있는 사내 허삼관을 만들어준 피.
아무리 뒤로 물러서고, 바닥을 기어도 사내의 몸 속에 흐르는 피의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허삼관에게 이제 팔 수 있는 피는 없다.

그 좌절이 아내와 마주한 돼지간볶음으로 기름질 수 있을까?
황주 한 잔으로 그 차가운 절망이 데워질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허삼관들에게 황주 한 잔씩 돌리고 싶다.
.. 따끈하게 데워서.

(200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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