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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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말을 했고, 서양식 드레스를 입었다.
참빗 대신 브러쉬로 머리를 빗었고, 샴페인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중전마마에게 자기 자신을 '소인'이 아니라 '저'라고 일렀다.
루브르를 감상하고 음악회와 독서회에 참석하며 그녀는 근대인이 되어갔을까.
온전히 자신을 인지하는, 봉건제다 근대다 국경이다 따질 것 없는
저 스스로의 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녀는, 그녀의 번듯한 저만의 이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숟가락으로 배를 긁어 먹여주던 중전의 젖은 소매 끝에 살았다.
침침한 등불 아래 서씨가 지어준 자리옷 안에서 살았고
가끔은 자신을 춘앵무로 이끌던 강연의 낮은 대금소리 안에 살았다.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콜랭의 팔짱 안에서도 잠시 살았다.
그리고 죽었다.

죽을 때 그녀가 그녀로 죽었는지 아닌채 죽었는지 모르겠다.
몸 속 곡기를 완전히 비워내고 비상 바른 불한사전을 씹어먹다 죽었으니
어린 시절 저 총기로 살아가던 궁 안에서 혼자 죽었는지
그녀로 죽었는지, 리진 또는 진이로 죽었는지, 서나인 또는 은방울로 죽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그러나 나는 그녀가 오롯한 그녀인채로 죽었기를 바란다

다만 그녀는 그녀로만 죽고 말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와 콜랭의 푸른 눈을 반반씩 닮은 아이가 태어났더라면
그녀는 그녀로 죽을 수 있었고, 또 그 아이로 계속 살아갔을 것이다.
보는 이에게 그녀의 단절이 이토록 비극적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냉이토장국을 또 끓여내면서 생은 계속 되어야 한다.
리진을 보낸 나도, 리진을 만든 작가도 그래서 또 울며 불며 글을 써야 하고.

(200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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