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서른살, 다섯개의 결혼반지
아직 내게 사랑이 남아 있을까..

책 뒷 표지에 쓰인 글귀가 눈을 사로 잡았다. 5번의 결혼이라... 이 여자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완득이'와 '우아한 거짓말'로 현재 우리 사회의 민감한 소수의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김려령 작가의 소설이라 한층 더 흥미가 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전작들과는 달리(?) 기간제 배우자를 알선하는 결혼정보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설정이 보다 픽션에 가깝다. 그래서 전작에서처럼 꿋꿋하고 따뜻한, 간지럽지 않은 감동을 기대했지만, 이전 소설과는 다가오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취업을 위한 면접장에서 조롱을 당한 후 다가온 새로운 직장. 급여도 좋고 정규직이나 다름없지만 까놓고 얘기하면 성매매나 다름없는 직장이다.

처음에는 주인공 노인지가 이 직장에 들어가는 이유가 '취업난'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사랑'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겉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사실상 '돈'으로 맺어진 계약관계이고, 실상 순수한 사랑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이다. 가장 순수하고 헌신적이라고 하는 부모의 사랑이 때로는 자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권력이 된다는 점... 겉보기에 아름다운 사랑과 인정받지 못하는 순수한 사랑..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생각을 조금 달리 생각해보게끔 한다.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계약관계이자 고객 서비스차원에서 결혼생활에 일어나는 부부간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들은 서로를 구속하고, 상대방을 바꾸려고하는 과정에 갈등이 생기고 헤어지는데, 오히려 계약으로 이루어진 부부관계는 서로를 바꿀 필요가 없고 기대하는 것이 없이 '역할'에 충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잘 유지된다는 점도 아이러니 하다.

세 친구의 우정, 미묘한 균열.. 후반부로 갈수록 추억속의 낯선 친구의 행동들과 우정에 생긴 균열의 원인이 밝혀지고, 주인공과 어머니의 갈등의 원인이 밝혀지며 앞에서 조금씩 생겼던 의문도 해소된다.

그래서 그녀의 취업은 어머니의 뜻과 생각에 도전이라도 하듯,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한 자의 선택처럼 보인다. 어머니께 복수하듯.. 어머니가 반대하는 사랑보다, 과연 이것이 더 옳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내던지며 질문하고 답하는 것은 아닐까?

역시나 술술 읽히고 문장이 명쾌해서 읽기 좋은 소설이었다. 다만 엄태성의 존재와 행동은 이해가 안가긴 한다. 소설은 독자가 읽음으로써 의미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책을 읽을 때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느끼며 읽지만, 마지막까지 등장한 엄태성의 존재는 작가가 어떤 의도로 넣은 것일까? (솔직히 그의 사랑이 순수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나도 정말 짜증이 나기 때문에 이해가 안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앞 뒤 표지를 다시 자세히 읽어보았다. 
앞 표지에 작은 흰색의 글씨로 희미하게 써 있는 
'몰랐고 끝까지 몰라도 됐을 모르는 게 더 나았을 그런 세계가 내 손을 잡았다'는 이 책의 전체 컨셉을 말해주고, 글을 읽으면서도 공감했던 뒷표지의 '어른만 되면 세상이 나를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건 내가 세상을 알아버리는 것이었다'라는 말이 슬프게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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