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2년 9월
평점 :
절판


장정일은 보편적 현실에 대한 왜곡을 표절이라는 소재를 빌어 독자에게 제시한다. 이 소설에는 표절이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방식과 장정일 스스로가 이 소설에서 차용하고 있는 인용의 형식을 빌린 괴테의 '파우스트', 영화 '내일을 행해 쏴라', 짐 모리슨의 도어즈 노래 가사, 도스토예프스키 '지하 생활자의 수기', T.S. 엘리옷의 황무지의 맨 마지막 구절인 산스크리트어 '샨티 샨티 샨티'(평화 평화 평화, p161) 같은 것들의 노골적인 뻬끼기, 후쿠야마 '역사의 종언',사드의 '소돔 120일' 같은 해석적 뻬끼기, 또 예술이 가지는 사회 반영적인 성격으로서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리얼리즘 논쟁 ' '벤야민의 정치사회의 반영으로의 텍스트 해석법'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러시아 형식주의' 같은 이론들의 내용을 풀어서 삽입 시킨 것 같은 계몽적 뻬끼기 등등 정말 다양한 표절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뻬끼기가 차용되고 있는 구성적인 재미와 다양한 박식에서 오는 깊이에서 독자는 사회에 비판 할 수 있고 유익한 웃음을 짓는 것이다.

현재 사회에서의 고통을 잊기 위해 꿈꾸는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죄절을 읽을 수도 있지만 다시 새로와지려는 희망을 본다. <은행원>의 성기가 커지는 꿈, 나의 소설 쓰는 꿈, 바나나 껍질이나 담배의 환각작용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은 이러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예고하고 진실을 알아가는 계기가 된다.

장정일이 여러 소설에서 포르노 그라피를 집어 넣는 이유는 소통 수단으로서의 성이 가지는 그 진실한 출발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은행원의 얻어 터지는 아줌마와의 첫사랑과 바지입는 여자의 노팬티와 같은 성적인 묘사와 신체의 폭력 장면(술집에서 이빨 깨지기, 이웃집 남자의 마누라 구타)는 감각에의 호소에 다름 아니다.(물론 장정일이 우려 하듯이 유치한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돌머리 독자도 있으리라...)

그 호소는 다른 단계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현상학에 의하면 <타자는 나 자신의 반영이며 유사자이다. 타아 즉 1차적 자연 세계 속에 있는 물체가 물체임에도 불구하고 파악되기 위해서는 나의 신체의 통각이 그 물체 속으로 이입되어야 한다. 이러한 감정이입을 통해 우리는 타아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진다.

즉 여기서의 타아경험은 '지식인은 그 한계를 드러냄으로서만 노동자를 가르친다'라고 이 소설에서 말하듯이 단순한 추론이 가지는 막연함과는 구별되어져야 한다. 서로의 세계를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지향적인 자세가 그 전제 조건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섹스나 쾌락에서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계기로서 자신을 알아가는 단계로서 그것이 필요하다. 성은 진정한 자기를 알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 도구이지 전체가 아니다 - .

<이 부르조아 세계엔 이토록 평화가 넘치네> 라고 수없이 말하며, 세상 앞에 장정일은 그 거울을 치켜 들며 신선한 모험을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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