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확신으로 굳어지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소위 말하는 발달사 내지는 변천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즉 어느 철학자는 과거의 무슨 생각을 극복했다거나 바꾸었다고 하는 것들에 대해 대부분 그 반대가 존재한다는 것. 아마 새로운 철학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늘 '새로운 문장' 찾기가 아닐까. 우리나라에서는 기호학과 언어학에 소쉬르에서부터 프랑스 구조주의로 이어지는 전통이 유행했지만, 그런 사유의 바탕은 헤겔 이전 훔볼트에 거의 완성된 듯하다. 서구 음성주의 전통의 극복을 말하는 데리다(그라마톨로지)는 결국 앵무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책은 훔볼트에 대한 개론서라기보다는 기존의 훔볼트에 대한 비판(나치즘의 선구)과 해석들에 대한 저자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 단편적인 유사점이나 다른 학자들에 대한 개론적인 이해를 경솔히 연결시키려는 데서 해설로 보기에는 다소 유치한 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언어학만을 전공하는 역자들의 무식함도 한몫한다.(사실 난 촘스키의 경우에서 보듯이 언어학의 결론은 사회학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조주의의 전통에 대한 영향에 대해서 다음 훔볼트의 글만 가지고 확신하는데 구조주의에 대한 어떤 전체적 조망이 없기에 다소 비약이라는 느낌을 준다. '어떤 언어 안에 무엇이 표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무슨 용도로 고유한 내적 힘에서부터 고무되고 감격하는가 라는 것이 그 언어가 우수하냐와 부족하냐의 결정요소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 언어학이나 철학사조에 대한 일관된 체계와 비교를 저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언어에 대한 상호 소통과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기원, 사회적 억압, 소위 말하는 타자에 대한 불확실성과 상상력에 대한 서술들. '최초의 것은 물론 말하는 사람 자신의 개성인데, 그 말하는 사람은 자연과 지속적이며 직접적인 접촉을 하며, 언어 안에서도 나의 표현을 자연에 대립시키는 것을 중지 할 수 없다.' '언어는 언제나 권력의 동반자이다.' 비코와의 비교를 하고 있는 7장에서 보이듯이 예술론으로 확대되는 상상력에 대한 고찰에서, 대상들이 인지되고 이것이 인간들에 의해 대상물로 나타나게끔 지향되고 변모되는 특성에 언어적인 것들의 특성을 찾는 것이다. '상상력이란 지성의 근본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상징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약화 되는 사회는 동시에 행동하는 그들의 능력도 잃게 된다.' 그의 형이 미국을 두번째로 발견한 인류학자로서도 유명한 훔볼트의 언어연구는 언어적 독특성에 숨겨진 세계관이나 관념에 대한 탐구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정치에서 은퇴한 40세 이후에 쏟은 학문에 대한 정열이나 프랑스의 디드로를 좋아하게 되어 그의 전집 15권이 나오자 단숨에 읽어 버린 것, 딸들과 저녁식탁에서 고대 희랍어로 얘기했다는 일화 등에서 그의 자유로운 정신에 다시 한번 자극받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