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
버나드 베일린 지음, 배영수 옮김 / 새물결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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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는 미국 혁명기에 발행된 수많은 소책자들을 통해 당대의 사람들이 경험한 지적 변화의 주요 흐름을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저자가 대단히 많은 양의 사료를 끈질긴 인내심을 갖고 분석하고 정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방대한 사료를 관통하는 커다란 흐름들을 밝혀낸 탁월한 저자의 안목이 책을 읽는 동안 필자에게 큰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책을 읽은 후에는, 미국 혁명을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독립 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과 역사적 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한 역자의 지적에 깊이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은 혁명기의 소책자의 성격에 대한 친절한 개괄을 서두로 하여,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 이론으로 발전해 나가는지 개괄한다. 그리고 이른바 ‘음모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 다음에, 대의제, 헌법, 주권 등에 대한 당시의 논의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 결과로서 등장한 노예제의 ‘모순 영국이 미국을 노예화한다고 비판하면서 미국인들 스스로 흑인들을 노예화한 것.’에 대한 논쟁과, 국가가 특정 종파를 국교로 지정하는 것과 그와 관련한 세금에 대한 논쟁,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헌법 제정에 대한 논의 과정을 다루는데, 여기서 당시 미국의 헌법을 구상한 사람들이 국민의 권리의 명시 문제와 연방 정부가 각 방가 정부와 어떻게 주권을 나눠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논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책은 經濟史․社會史적인 설명을 중요시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저자는 중요한 정치적 개념의 의미 변화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필수적일 경우에만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거론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政治史․思想史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經濟史․社會史를 누락시켰으며 세계사를 사상의 움직임으로서만 파악하는데 치중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러나 저자가 당시의 사회상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특정한 정치적 개념들은 초창기 미국의 사회적 상황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전제가 책 전체에 걸쳐 깔려 있으므로 저자의 선택은 충분히 타당한 방법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영국이 식민지를 압박한 것이 稅入을 늘이기 위해서였고 식민지가 영국에 저항한 것도 부당한 것으로 보이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데올로기적 담론은 이 경제적 투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점은 숙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주민들은 시민적 자유에 대해 상당히 급진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다. 의원이 선거구민들에게 책임을 진다는 관념, 폭군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관념, ‘대표가 없는 곳에는 세금도 없다’는 관념 등이 급진적으로 형성되었다. 대의원과 행정부의 본질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가 널리 전개되었고, 의회의 형태, 나아가서는 정부의 형태가 치열하게 논의되었다. 당대 미국의 급진적인 인민주권론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격렬한 순간에 형성된 것과 비교할 때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저자의 서술을 직접 따서 보기로 하겠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정치적 경험이 달라서 대의제에 대한 기대가 달랐고,” 따라서 영국 의회에 있는 의원들은 미국인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영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의원이 선거구민의 직접적인 구속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당대 논객들은 인민이 직접 또는 대표를 통해서 동의한 법률 외에는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입장이 “새로운 입장”이며, “본질적으로 공화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영국 군주정에 대한 전면적 도전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많은 당대 미국인들은 인민의 동의만이 政體의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자유주의가 승리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과 더불어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 바로 미국인들의 예외주의다. 베일린의 이 저서가 한국인 독자인 우리에게 가장 크게 시사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인들은 일찍부터 자신들이 특별한 유래를 갖고 있고, 특별한 환경에서 살고 있고, 특별한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이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인류의 희망에 의지하며 또 그것을 실현하고 충족시킬 독특한 역사적 위치에 서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은 ‘또 하나의 영국’이며, 동시에 ‘영국보다 더 순수하고 더 자유로운 곳’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이는 존 로크나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이 아메리카를 ‘양호한 자연 상태에 가까운 곳’ 또는 영국의 장점을 모두 모아 둔 곳으로 간주해 온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다. 18세기 미국인들은 모국, 즉 영국의 정치 체제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국이 부패하고 음모에 휘말려서 전제국가가 되면 미국이 ‘자유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 믿었다. 어느 나라나 자국 특유의 역사와 환경을 갖고 있다. 미국의 ‘예외주의’가 지금까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느 정도 미국이 역사적으로 강자였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미국 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원』은 생각할만한 점을 많이 던져주고, 쉽사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진 책이다. 다만, 사상과 법이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실제 생활상은 그렇지 못할 수 있는 만큼, 이데올로기의 기원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한 시대를 파악하는 데 부족함이 있으므로 다른 연구와 같이 보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특히 당시의 정치적 담론이 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것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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