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교육학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아래 발췌문 정도는 대단히 재밌습니다.
=================
우리의 문제는 모든 지능이 평등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지능이 평등하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이 의견이 가능함을, 다시 말해 그 逆의 어떤 진리도 증명되지 않음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p. 95.
=================
지능의 불평등을 신봉하는 사도들 절대다수가 생리학자들을 따르지 않을뿐더러 頭蓋 진찰을 비웃는다......그들의 우월성은 정신적이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을 후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정신주의자다. 그들은 非물질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믿는다. 그러나 非물질적인 것이 어떻게 더 많고 더 적을 수 있을까? 그것이 우월한 정신을 가졌다는 자들이 빠지는 모순이다. 그들은 非물질적인 영혼, 물질과 구분되는 정신을 바란다. 그들은 지능들이 다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질이다. 불평등을 고수하려면 (정신이) 두뇌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신적 원리의 단일성을 고수하려면, 동일한 지능이 다른 정황 속에서 다른 물질적 대상들에 적용된다고 말해야 한다. p. 98.
=================
생리학자는 정당하게 그러므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에게 다른 사실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더 똑똑하다”라고 말하면서 당신은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관념들을 요약했을 뿐이다. 당신은 그 사실에 하나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이름이 그것의 원인은 아니다. 기껏해야 그것의 은유일 뿐이다. 당신은 처음엔 “그는 더 성공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을 이야기했다. 당신은 “그는 더 똑똑하다”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하나의 이름으로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두 번째 진술에는 첫 번째 진술에 있는 것 이상이 없다. “이 인간은 더 많은 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 다른 인간보다 더 성공한다. 이것은 정확히 다음을 뜻한다. 그는 더 성공하기 때문에 더 성공한다...... 이 젊은이는 훨씬 많은 재주들을 가졌다고들 한다. 나는 묻는다. 뭐가 더 많은 재주들인가? 사람들은 나에게 두 아이의 이야기를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한다. 더 많은 재주란 프랑스어로 내가 방금 들은 사실들 전체를 뜻한다고. 그러나 이 표현은 그 사실들을 조금도 설명해주지 않는다고.” pp. 100~101.
=================
보통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낮은’ 지능이 자연의 효과인지 사회의 효과인지 논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욕구와 실존적 상황이 그들에게 요청하는 지능을 개발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서 지능은 쉰다. 더 강한 어떤 의지가 그의 소리를 들리게 만들고 계속하라고 말하지 않는 한 말이다...... 인간은 지능의 시중을 받는 의지이다. 어쩌면 지적 성과의 불평등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는 주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의지가 불평등하게 절박하기만 하면 된다. p. 104.
=================
......소크라테스의 방법이 바보 만들기의 가장 무시무시한 형태를 대표한다. 학생을 그의 고유한 앎으로 이끌 수 있다고 자처하는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은 사실 승마 교사의 방법이다. “승마 교사는 선회, 전진, 후진을 명령한다. 그는 자기가 지도하는 정신이 말을 타는 동안 느긋하게 쉬면서 품위 있게 명령한다. 우회하고 또 후회하여 (학생의) 정신은 자기가 출발할 때 예상하지도 못했던 목적지에 도착한다. 정신은 그 목적지에 닿은 것에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그의 길잡이를 알아차린다. 놀라움은 존경으로 바뀌고, 이 존경은 그 정신을 바보로 만든다. 학생은 느낀다. 혼자 버려져 있었다면 자신은 이 길을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고유한 궤도 위에 있지 않는 한 아무도 진리와 관계 맺을 수 없다. p. 119.
=================
전체의 본성은 부분들의 본성과 같을 수 없다. 사람들이 사회에 합리성이라고 부여하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로부터 앗아간다. 그리고 사회는 개인들에게 (그 합리성이 있음을) 거부한다. 사회는 자기를 위해 (개인들에게서) 합리성을 앗아갈 수는 있지만, 개인들에게 결코 그것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성이나 이성의 동의어인 평등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성이나 평등을 실제 개인들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개인들의 허구적 모임에 귀속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평등에 대한 약간의 애정을 가진 자라면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들은 실재하는 존재들이고, 사회는 허구이니 말이다. 평등은 실재하는 존재들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지 허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해방된다는 말이 뜻하는 바다...... 능력자들과 공화주의의 핵심 세력들이 몸을 마치고 있는 그 과제는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장을 택한 자에게는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한 가지 수단밖에 없다. 즉 사회를 통째로 애 취급하기, 다시 말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일반적으로 아이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중에 그것을 평생 교육, 다시 말해 설명하는 제도와 사회의 공외연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월한 열등자들의 사회는 평등할 것이며, 또 그 사회는 그것이 설명을 들은 설명자들의 사회로 완전히 탈바꿈했을 때 그 불평등을 축소하게 되어 있을 것이다. pp. 250~251.
=================
식자와 유력자처럼 프롤레타리아들은 평등을 인정하는 조건에서만 그 단어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은 그들의 옹호자들과 그들의 상대자들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하는 한에서만 평등을 입증할 수 있었다. p. 257.
=================
중요한 것, 즉 자유의 발현은 다른 곳에 있다. 자유는 이 적대적인 입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편이 다른 편을 번역하는 평등한 기술에 있다. pp. 257~258.
=================
평등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이었다. 결코 진리는 평등을 위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평등은 오로지 그것의 입증 속에서만, 항상 도처에서 스스로를 입증하는 것을 대가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p. 2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