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롱보다 몽롱 - 우리 여성 작가 12인의 이토록 사적인 술 이야기
허은실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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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혼자 술 마시는 여자들, 혼자 우는 여자들, 서성거리는 여자들, 중얼거리는 여자들, 두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들, 심장이 터지게 액셀을 밟으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들, 눈알이 번뜩이는 여자들, 그 여자 정신이 아주 나가 버렸대. 그런 여자들을 나는 알지. 친애하는 나의 자매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안아 주지 않을지라도 술은 그대들을 안아 주기를. 이 밤 안전하게 취해 있기를. 내내 안녕히, 안녕하기를" p.23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보통 어린이들에게 하는 고 녀석 참 똘똘하네, 크게 되겠네, 이런 게 아니었다. 어른들은 이상하게 나를 보면 너 커서 술 참 잘 마시겠다고 했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렸을 적부터 덩치가 남달라서였는지, 아니면 모두 알코올 중독으로 병사한 친가의 이력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언제가 되었든 얼큰하게 취해있었던 모부를 보고 어림짐작한 건지, 이유는 영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런 말을 듣고 자란 나는 실제로 술을 '잘', '많이'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며 집에 돌아와 마시는 맥주, 한겨울에 오들오들 떨면서 포차에 들어가 따신 국물에 소주, 일식점에 가면 꼭 시키는 하이볼, 연말에 케이크니 음식을 한가득 차려놓고 마시는 와인까지. 술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고 나는 주종을 가리지 않고 힘껏 탐닉했다. 나는 술자리가 좋아서 술을 마시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술이 좋아서 술자리에 나가는 사람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홀로 한 잔 할 때고, 그보다 좋을 때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다.
작가들이 애주가인 건 원래부터 유명한 사실이지만 시인들 또한 그런 줄은 몰랐다. 허나 생각해보면 시처럼 술과 비슷한 게 있을까. 또렷한 현실을 조금 비켜가게 해주는 아름다움. 영롱하기도, 몽롱하기도 하고 쓰면서 달콤한 맛까지.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이 내가 사랑하는 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니, 기대를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신나는 기분으로 와인을 마실 때 꼭 먹는 과자 한 아름과 디저트, 백화점에 가서 산 레드 와인을 준비해놓고 책을 폈다. 한 챕터를 읽고 바로 잔을 내려놓고 편의점으로 달려가 만 원짜리 화이트 와인을 사 왔다. 비싼 술을 들고 젠체하며 읽어서는 맛이 안 살았다.

마치 여러 명의 낯선 사람들과 만나 거나하게 취한 뒤 2차나 3차쯤에서 나누게 되는 진솔한 이야기 같은 글부터 아 전 술은 사양할게요, 하며 금주의 원인에 대해 털어놓는 이야기까지. 정신없이 글과 함께 마셨다. 술에 취하면 섧게 우는 사람, 과거 얘기를 하는 사람, 조용히 마시다 고꾸라지는 사람, 하염없이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끔 참된 이야기꾼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술이 술술 넘어간다고 하던가. 기껏 사 온 주전부리도 몇 개 먹고 만 채 술에만 기대어 책을 읽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그럼에도 영롱한 글들을 가만가만 읽다 보니 술이 다 깨어 또랑또랑한 눈으로 내일 또 봐, 하고 싶어진다. 오늘 재밌었어, 내일 또 봐. 내일은 술 말고 커피 마시자. 이런 말이 실현된 적은 없을지라도, <영롱보다 몽롱>은 맨정신에 다시 읽을 수 있겠지. 그러나 또다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안아 주지 않는" 밤, 술이 절실히 필요한 밤엔 꺼내어 읽으며 한 잔 홀짝일지도 모르겠다. 고마운 마음으로 나를 안아주는 책에 기대어 조금 훌쩍이면서.

안녕히,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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