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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들의 삶과 언어
김순자 지음 / 한그루 / 2016년 11월
평점 :
지난 2016년 4월 제주로 이사를 왔다. 남편과 3살 아이와 함께. 수도권에 살면서 아이 키우기가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면서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이자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살고 있는 제주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 공기가 맑은 시골에서 살아보고자 오래된 시골집에 살면서 예전 제주 사람들처럼 살아보려 했으나 만만치 않았다. 태풍에 돌담이 무너지고 집 안팎에서 만나는 지네와 뱀에 몸서리를 치며 더위와 추위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결국 반 년 만에 시골집에서 나와 시내로 이사를 왔다. 멋모르고 부딪친 제주의 삶이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교훈을 깨달은 나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옛날 제주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냉장고도, 제습기, 전기장판도 없는 시대엔 대체 어떻게 제주의 거친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낸 걸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제주 관련 이런저런 책을 찾다가 만난 책이 바로 김순자 선생님이 쓴 『제주 사람들의 삶과 언어』이다. 500쪽에 가깝게 두꺼운 이 책은 제주에서 태어나 평생을 제주에 대해 연구해 온 선생의 성과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그들의 생생한 언어로, 그리고 그것을 표준말로 번역하여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는 것이다.
내 어머니는 제주에서 태어나 10살 무렵 서울로 이주해서 지금까지도 육지에 살고 있다. 지금은 제주어를 다 잊었다고 한다. 이모들과 외할머니는 제주어를 쓴다. 이모와 외할머니와 이야기하려면 두 번 세 번 다시 물어봐야 한다. 한 세대 사이에서도 이렇게나 언어가 다르다. 따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제주에 살더라도 제주어를 쓰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 이미 제주어는 잊히고 있는 중이라 제주에서 제주어를 하지 못하더라도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하지만 정말 불편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제주어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그 지역 사람들이 살던 모습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왜 이 그들의 삶을 알아야 할까? 그것은 내가 이제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제는 경제적으로는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풍요롭다. 풍요롭지 못해 넘쳐서 문제다. 반대로 열악했던 예전 제주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있지만 내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심지어 예전의 삶이 더 풍요로워 보일 때도 있다.
책에는 농사, 물질, 출산, 혼례, 장례, 음식, 제사 등이 제주어로 생생하게 전해진다. 더불어 흑백사진이지만 그 어떤 박물관에서도 보지 못한 물건들을 140여 장의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오일장이라든가 옆집 어른의 집에서 책에서 본 차롱이나 구덕 같은 도구들을 실제로 접한다면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 물건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촌들에게 그 물건에 얽힌 추억이나 삶에 대해 듣게 될 때도 있다. 정말 제주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제주 사람은 누구를 뜻하는 걸까? 제주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 2년이 좀 넘게 제주에 살며 가장 스스로에서 많이 물었던 질문이다. 나는 육지에서 태어나 자라 이주했으니 평생 이주민인가? 반대로 제주에서 태어나 자라 육지로 이주하더라도 제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단순히 다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왜 제주만이 어느 지역보다 강하게 ‘제주 사람’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걸까? 4·3의 아픈 기억과 험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제주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건 그들이 살아온,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제주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삶과 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새겨져 있는 제주어를 알아야 한다.
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우선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물론 관공서나 민간에서 벌이는 다양한 행사나 강좌들도 많지만, 우선은 혼자 가장 빠르고 쉽게 제주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목소리를 내서 읽는 것도 좋다. 제주어에 익숙해지려면 책에 나온 구술 정도는 술술 읽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한 권만 정독해도, 제주에서의 삶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로 이사 온 사람들에게, 제주에서 태어났지만 예전 제주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짜 ‘제주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잊혀져가는, 잊히는 안 되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한 꿰미에 꿰어 진짜 제주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몇 백 년 만에 가장 더웠다는 여름을 보내고, 하늘이 높아지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온다. 관광지라는 포장지를 벗겨낸 진짜 제주의 속살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