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 젊은 인문학자의 발칙한 고전 읽기
오세정.조현우 지음 / 이숲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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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갈수록 이야기를 해석하는 재미를 느낀다. 조현우 선생님에 이어 오늘 처음 만난 오세정 선생님도 엄청난 유모와 해박한 지식과 열정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두분이 친구가 된 이유를 알 거 같다.
 
오늘은 <심청전>, <사씨남정기>, <나무와 선녀꾼>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을 들었다. 세가지 소설을 순서에 상관없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정신이 좀 없기는 했지만 이 세 소설을 통해 여자의 문제를 들여다 보는 시각이 흥미로웠다. 남자로서 좀 찔리기도 하고.
 
심청이 앞에는 항상 효녀라는 말이 따라 붙듯이 <심청전>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를 강조한 대표적인 소설로 당연히 생각해 왔는데 과연 심청이를 죽인 건 누구일까? 질문 자체가 워낙 낯설어 대답을 못했는데 가정 권력의 상징인 심봉사, 경제권력의 상징인 뱃사람들, 종교권력의 상징인 화주승이 심청이를 죽음으로 내 몰았다고 한다. 즉 심청이는 남성 사회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약자가 오히려 공동체가 어려울 때 제일 먼저 희생을 강요당했다. 오늘날에도 남편과 자식을 위한 여성의 희생이 아름다운 미덕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걸 보면 <심청전>은 단지 옛날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사씨남정기>17세기에 김만중이 쓴 소설로, 유연수라는 사람이 너무 예쁘나 음탕하고 사악한 둘째 부인 교씨의 꾀임에 빠져 조강지처(糟糠之妻) ‘사씨를 내쫓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교씨를 벌하고 사씨와 다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인데 이 글이 씌여진 역사적 배경이 흥미롭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전까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결혼하고 나서도 자신이 결혼할 때 가져온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리를 보장받았으나 17세기부터 주자학과 가부장제가 전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이는 여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켰다, 장자 상속이나 남성 혈통만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정착된 것도 이 시기였다. 양란(兩亂)에 대해 책임져야 할 계층인 양반이 자신들의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되자 사회통제를 강화한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요청된 악녀교씨와 정숙한 여인 사씨를 통해 가부장제도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전국적으로 효자, 효부를 칭송하는 비석이 생기게 된 것도 조선시대 후기인데 효를 숭상하고 가부장제를 체화시키면서 권위에 대해 복종하다 보면 임금에 대한 충성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법. 양란 이후 내부적으로 붕괴되었어야 할 조선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사상통제의 효과때문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수탉이 왜 우는지에 대한 유래를 보여 준 재미난 글로 알고 있었던 <나무꾼과 선녀>도 많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사실 나무꾼은 선녀를 납치한 거고 애까지 낳게 한다. 미성년자 납치에 감금, 강제 결혼, 강제출산에 강제노동(집안일)까지 시켰으면 거의 무기징역감? 불쌍한 선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살다가 나무꾼이 방심해서 보여 준 날개옷을 보고 결혼생활 동안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아 하늘로 돌아간다. 그후 선녀를 그리워하던 나무꾼은 사슴의 도움으로 하늘로 올라가 선녀와 자식을 만나게 되지만 그러자 이번에는 땅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된다. 와이프와 어머니를 놓고 갈등하는 남자의 고뇌를 볼 수 있다. 고부(姑婦)갈등이 있을 경우 남자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친구에게 선배가 했던 멋진 조언이 기억난다. 부부관계는 인연(因緣)이고 부모와 자식 관계는 천륜(天倫)이라고. 따라서 인연이란 헤어지면 남남이지만 천륜은 끊을 수가 없다고. 어머니 편을 들면 와이프는 떠나지만 반대로 와이프 편을 들더라도 어머니는 아들을 버릴 수 없으니 무조건 와이프 편을 들어야 한단다. 비록 어머니가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며. 결국 그 친구는 그렇게 했고 신기하게도 선배 말 그대로 됐다. <주의>이 글보고 따라 했다가 가정 파탄날 경우 책임 못짐!!!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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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 젊은 인문학자의 발칙한 고전 읽기
오세정.조현우 지음 / 이숲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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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敍事)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오늘 강의를 듣고 나서 떠오르는 질문이다.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본 이야기라는 뜻인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은 조선의 천재 김시습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출가(出家)하여 쓴 『금오신화』에 나오는 다섯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능력은 있으나 가난한 양반집 자제인 이생이 부유하고 권세있는 양반집 처자 최랑의 구애를 받아 우여곡절 끝에 혼인을 하고 과거에도 합격하여 잘 살았으나 최랑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죽음을 맞게 되어 그녀의 혼령과 몇 년간 살다가 혼령이 떠나자 이생도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건 이 이야기가 당시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소위 출세하지 못한 양반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다 이생이 최랑의 적극적인 구애로 부자집 사위가 되었으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전쟁이라는 우연한 사건으로 아내를 잃게 되고 결국 슬픈 최후를 맞게 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백두(白頭)들은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의지나 능력보다 ()에 달렸는데 지금껏 본인들이 요모양 요꼴로 사는 것은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 위안했을 지도 모른다. 
 
시대가 흘러 장르가 다양해졌을 망정 소설, 연극, 드라마와 같은 서사를 띤 매체가 여전히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이유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은 소설 속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키면서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후련함을 느낀다. 그 근저에 흐르는 인간의 욕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아닐런지.
 
인지적부조화이론(認知的不調和理論)이라는 것이 있다. 인지부조화란 사람이 두 가지 모순되는 인지요소를 가질 때 나타나는 인지적 불균형상태를 뜻하는데 심리적 긴장을 유발하므로, 사람들은 이를 해소하여 심리적 안정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하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결정을 극단적으로 합리화하는 형태로 나아가며,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고 알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게 된다. ( by 네이버 백과사전)
 
결국, 소설을 보고 느끼는 대리만족이나 인지적부조화이론은 궁극적으로 자기 인정’, ‘자기 합리화로 통하는 거 같다.
 
하긴 인류의 문명이란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스스로를 정당화 한 작업들이 누적된 것이지 않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야훼의 창조신화가 있다면 그리스인, 로마인들에게도 그리고 조선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신화가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기독교와 불교를 통해 천당과 지옥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 하였고 바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모범사례들을 제시했다.
 
발을 딛고 사는 땅의 삶은 어떠한가?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8 15일을 광복절이 아닌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한 이야기를 우리는 역사라고 배웠고 아직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조현우 선생님 강의 중에 말씀 하신 서사의 경합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때로는 상충되기도 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만들고 선택할 것인가?
 
행복한 삶이란 지식에 의해 인도되고 사랑에 의해 고무되는 삶이다라는 러셀의 말 정도면 괜찮은 답이라 생각된다.  
 
너무 장황하게 말이 많았다. 결론은 마누라가 드라마, 연애소설 본다고 무시하지 않기.
 
드라마 속 꽃미남을 보면서 잠시마나 행복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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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 - 젊은 인문학자의 발칙한 고전 읽기
오세정.조현우 지음 / 이숲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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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내가 나타났다. 그런데 가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우긴다. 가족들은 헤깔려 하기 시작한다. “여보, 애들아, 내가 진짜 당신 남편이고 아빠야”라고 주장해 봐야 소용없다. 옛추억을 얘기해 봐도 몸 깊숙이 숨겨진 흉터를 들이밀어도 가짜는 그것마저 똑같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내가 진짜임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나는 여자로 태어났다. 사회는 여성에게 맞는 옷차림, 가정에서의 역할, 직업을 요구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젠더(gender)를 벗어 던져버렸다. 남자들의 옷이 나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 직업도 군인을 택해서 남자들을 지휘하고 최고의 위치에 올라갔다. 사회는 나를 가둬두려 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했다.
 
『고전, 대중문화를 엿보다』의 저자 조현우 선생님은 「옹고집전」,「정수정전」을 자기정체성을 묻는 글로 해석하고 있다.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내가 옹고집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마누라에게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수단으로 ‘눈빛’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눈빛이란 교감을 뜻하지 않는가. 배우자의 눈빛을 알아 볼 수 없다면 그 둘 사이는 어느새 멀어졌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옹고집전」은 부부 사이의 친밀도를 테스트 해 보라는 교훈을 주는 글은 아니란다.
 
오랜만에 주말 산행을 다녀왔다. 정수정에 대한 강의를 들어서인지 한참 동안 사람들의 옷 색깔을 살펴봤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여자들은 99% 붉은 계열, 반대로 남자들은 푸른 계열 옷을 입었다는 것. 국가대표 축구 경기 응원할 때는 여자건 남자건 다 붉은 옷을 입는데 왜 산에 갈 때는 여자만 붉은 옷을 입는 것일까?
 
사람들의 삶은 어쩜 정수정이 처해 있는 상황과 그리 비슷한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삶이란, 사회(가정)의 지속적인 요구에 개인이 부응하는 과정의 연속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사회화 과정’이라고 하나? ‘모범생’이란 사회화 과정을 훌륭하게 해 내 사람들을 뜻하는 거고, ‘군대 가서 철들었다’는 건 권위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삶을 체화했다는 뜻이지.
 
우리사회의 좀 지나친 사회화 과정을 살펴보면, 학생은 공부만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만 가면 되고 선생님은 시키는 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되고 주부는 우리애만 잘 키우면 되고 직장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만 잘 벌면 되고. 물론 남자에게 복근은 기본,  여자에게 S라인과 성형수술은 에티켓.
 
충실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옹고집처럼 ‘나는 누구인가‘를 말하기 힘든 때가 오지 않을까? 그러기에 정수정처럼 치열하게 자기만의 삶을 찾아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좀더 실용적으로 바꾼다면 ‘나는 누구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 ‘내가 죽고나서 지인들이 문상을 왔을 때 내 자식에게 배우자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다고 말해 주기를 원하는가’ 라고 고쳐 볼 수도 있겠다.
 
문상 온 지인들이 ‘너희 아버지는 우리 친구 중에 가장 부자였다’ , ‘당신 남편은 대기업 사장이 된 뛰어난 분이었다’ 보다는 ‘너희 아버지는 주위 사람에게 배려가 많고 자상한 분이셨다’ , ‘당신 남편은 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상사였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좀더 찡하지 않은가?
 
각 장마다 더 읽을 만한 책을 친절하게도 소개해 주신 오세정, 조현우 선생님의 스타일을 베껴서 나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감동을 해 준『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마나 마하리쉬, 청하, 2007)에 나오는 글 중 일부를 소개하면서 마친다. 좀 어렵다.
 
●<나>는 누구입니까?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중략)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순수한 앎〕(Awareness)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어느 때에 진아 진아 眞我(진정한 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현상계(現象界) 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진아를 깨달을 수 있다.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집니까?
현상계에 대한 모는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중략)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진아가 곧 현상계이고 진아가 곧 개인이며 곧 신이다. 진아는 모든 것이다.
 
(이하는 과감히 생략)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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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 코벨의 한국문화 2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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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육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 사실 그동안 강의를 소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특히 오늘 강의는 좀더 어려웠다. 회화도 잘 모르는데, 그것도 생소한 동양화인데, 게다가 오늘은 일본 회화라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는 하였으나 리뷰를 쓰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찾은 책이 『에도시대의 일본미술』(크리스틴 구스 저, 예경, 2004). 그러나 이 책 주변에 꽂혀져 있는 책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글을읽다, 2008). 어라, 저자가 외국인이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뒤늦게 일본문화의 근원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했으며 한국문화에 대한 1천 4백여 편의 논문과 5권의 영문 저서를 냈다는 이력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한ᆞ중ᆞ일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 궁금했던 차에 서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충격이었다. 좀 길게 인용하겠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재는 런던에, 일본의 문화재는 보스턴에 많이 가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런던에 있는 이집트 문화재는 처음부터 이집트 것으로, 일본 것은 일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 일본에 가 있는 한국 문화재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일본 작품, 혹은 중국 것으로 왜곡돼 인식되고 있어서 이제 와서 한국이란 근원을 찾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가 되었다.
어째서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일본 내의 박물관장들은 아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 유교가 지배적인 일본에서 그 누구도 오래 전부터 일본 것으로 치부해놓은 예술품의 분류가 부정확할 뿐더러 국수주의적 행태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해서 일본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행동을 저지르려고 하지 못했다. 또는 1981년 현재 한국의 모든 박물관장은 일본식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 내의 많은 예술품들이 사실상 한국 것임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한국 것임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밝혀서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한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한국의 학계(1981년 현재)는 그렇게 소극적인가? 지금의 나이든 학자들은 과거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들에 대한 무슨 의리나 의무 같은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아직 서른이 안된 젊은 학도들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을 테니까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서 케케묵은 주장을 일소해버렸으면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앨런 코벨(카터 코벨의 아들)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중인데 한국이 초기 일본역사에 미친 확고한 영향의 여러가지 내용을 증명해낼 작정이다. 그가 힘을 내서 이 일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나는 때때로 독자들로부터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관계가 항상 그렇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방적 흐름’만 계속되었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 그 흐름은 사실상 99퍼센트까지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으로 지속되었으며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 및 건축가 그리고 도공들을 통해서 그 영향이 나타났다. 그 반대 방향의 물결의 최초로 흐르게 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로서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많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식 구도에 일본식 색채를 사용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당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 글이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썼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너무 창피했다. 한국은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다는 슬픔 현실을 새삼 떠올리면서. 2008년 한국어판 출간 시 아들 앨런이 전하는 어머니 존의 말을 더 인용하겠다.
 
 한국인은 그 나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순수한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내가 아무리 일본어를 잘하고 일본역사와 문화에 정통해 있어도 그들과 동화되기가 어려웠다. 여기 한국에서는 내가 진실로 따뜻하게 맞아들여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의 그런 마음은 순수한 데서 온 것임을 나는 알 수 있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한국인의 조상 부여족의 실체를 파헤쳐 그들의 에너지를 이어받는 것이야말로, 오랜 기간 지속된 유교의 침체된 분위기보다 한국의 미래를 확실하게 해 줄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있다.
 
제1장 한국 무속과 일본 신토
제2장 백제의 불교 전파 – 아스카 불교문화
제3장 백제미술의 보고, 호류지
제4장 꽃피어난 문화
제5장 한국에서 사라진 고려불화
제6장 일본으로 간 조선화가들
제7장 15세기 교토의 한국센터, 다이토쿠지
제8장 한국예술 되살리기
 
 편역자 김유경씨가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존 카터 코벨이 “한국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받은 것도 없이, 이만한 학문을 이룬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조정육 선생님께서 기회가 된다면 고려 불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을 읽으면서 고려 불화에 대한 탁월함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려 불화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있다. 고려 불화를 통해 조정육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며 그동안 동양화에 문외한(門外漢)이었던 사람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끔 이끌어 주신 데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존이 목조(木造) 구다라(百濟)관음과 구세관음에 대해 백제 것임을 논증하면서 나온 내용 일부와 사진, 이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백제는 모든 힘을 불교 진흥에 쏟고 국방을 소홀히 한 나머지 패망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지의 건출술이나 구다라관음(百濟觀音), 몽전(夢殿)의 구세관음(救世觀音), 사천왕상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치켜 올려진 금당(金堂)의 정교한 지붕선 등에 오늘날까기 살아남아 온 세계 사람들의 격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은 호류지를 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이라고 감탄하지만 사실상 그 무사의 아름다움이 백제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조차 백제가 6세기 중엽 일본에 불교를 처음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1세기 반에 걸쳐 일본 땅에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돈과 사람과 기술을 보내어 막중한 도움을 주었던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이늘이 '고대 불교문화의 영화'라고 향수 어린 감정으로 회고하는 것이 사실은 다름 아닌 백제 땅에서 꽃피웠던 불교문화의 그림자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p.81).
 
 호류지의 모든 비밀행정, 쇼토쿠 태자와 스코이 여왕의 전 재위 기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의 예술과 문화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복잡하게 짜인 시대였으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구하거나 실제로 만들어지는 데 엄청난 의지가 되었던 시대였다. 백제예술을 알기 위해선 반드시 감식안을 가지고 호류지를 가봐야 한다. 그곳 문화재 표지에 기록된 사항이 어떻게 왜곡된 것이든, 혹은 아예 표지조차 붙어 있지 않더라도 그런 것에 개의치 말고 자신의 감식안을 통해 보아야 한다. 비록 한국 땅은 아니라 해도 거기에 몇 세기를 지나고도 찬란한 빛을 발하는 한국의 문화유산이 있는 것이다(p.117).
 
   
▶구다라관음
  


 
▶구세관음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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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화가 김홍도 - 한국편 1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한국편 1
최석태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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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 조정육 선생님께서 5000년 우리민족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극찬한 김홍도의 삶과 작품을 『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 화가 김홍도』(최석태, 아이세움, 2001)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두 차례의 절정기가 있었습니다. <꿈 속에 노닌 복숭아밭 夢遊桃源圖> 그림으로 이름난 안견과 흐르는 물을 보는 남자를 그린 선비 화가 강희안이 활동한 시기, 즉 세종대왕 시기가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금강산 그림으로 유명한 정선과 우리가 살펴보려는 김홍도가 활약한 시대로, 숙종 임금에서 비롯되어 영조와 정조대왕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른 때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앞 시대에는 사대부에서 직업 화가인 화원에 이르기까지 중국식 산수화와 인물화, 매화와 대 그림이 성행했다면, 뒷 시기는 우리 땅 풍경을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사경, 우리네 삶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 등 서민 취미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김홍도는 1745년,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8살 무렵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뿐만 아니라 시·글씨·독서교육을 받고 10대 무렵에는 김응환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 20세 전에 도화서의 화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21세에 <경현당 수작도 연병(景賢堂受爵宴圖屛)>을 그린 후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영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된 것과 일흔 살의 장수를 기념하여 연 행사를 그린 것입니다.

<경현당 수작도 연병>

28세에 영희전을 다시 지으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참여한 화원 15명의 대표로 나올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29세에 영조와 훗날 정조의 초상화 그리는 일에 5명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32세에 <군선도(群仙圖)>를 그렸고 정조에게 <규장각도(奎章閣圖)>를 그려 바쳤습니다. 
 


<群仙圖>


<奎章閣圖>

37세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38년에 스승 강세황과 함께 호랑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표피도(豹皮圖)>

<표피도>에 대해 손철주(미술 칼럼니스트•학고재 주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니은 디귿 이응 그리고 이 아 으…. 한글 자모를 뒤섞어 놓은 듯한 그림, 도대체 무엇인가. 돋보기를 대고 보면 자세하다. 자모 사이사이에 잔털이 촘촘하다. 아랫부분에 마주보는 기역 자는 눈썹이고, 밑에 둥그스름한 부분은 눈자위다.
맞다, 표범이다. 표범이긴 한데 껍질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이 그림 참 대단하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이 소장한 북한의 국보다. 터럭 한 올 한 올 다 그리려고 만 번이 넘는 잔 붓질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보꾹 그림을 그리다 등이 활처럼 굽었다. 짐작컨대 단원은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을 테다.
그 고역을 치르며 표범 가죽을 구태여 그린 이유가 뭘까. 가죽은 한자로 ‘혁(革)’이다. ‘혁’은 또 고치고 바꾼다는 뜻이다. 표범은 철따라 털갈이한다. 무늬가 크고 뚜렷해진다. ‘군자표변’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군자는 표범이 털갈이하듯 선명하게 변한다. 선비인들 다르랴. 사흘만 안 봐도 눈 비비고 볼 상대로 바뀐다. 그것이 ‘괄목상대’다.
새해가 되면 다들 마음먹이를 다시 한다. 해도 군자나 선비가 못 되는 이는 ‘작심삼일’이다. 단원은 오종종한 인간을 꾸짖는다. 인두겁을 써도 표범 가죽 쓴 듯 행세하라.



<황묘롱접도(黃猫弄蝶圖))>



<황묘롱접도> 중 일부


<선면 협접도 (扇面 蛺蝶圖)>

부채에 씌어진 글씨는 다음과 같습니다.
석초 : 나비가 비스듬히 날며 날개를 편치 모양새도 좋지만 색깔은 천연의 빛을 어찌 얻었을까?
글쓴이 모르는 글 : 즐겁게 훨훨 날던 장자의 꿈 속의 나비가 어찌해 부채 위에 더 올랐느냐.
강세황 :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1783년, 39세 되던 해 우수한 화원을 따로 뽑아 운영하는 자비대령 화원제도가 시작되었으나 여기서 특별히 열외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44세에 정조의 명령으로 금강산과 그 주변의 경치를 그리기 위해 김응환과 여행을 하고 45세에 영남 지방의 명산을 다니며 그림을 그립니다.


김홍도의 <총석정>


김홍도의 ≪금강산 해산첩≫ 중 <총석정>


정선의 <총석정> 
 

  

이인문의 <총석정>


이재관의 <총석정>

강원도(북한) 통천군 통천읍에는 총석정(叢石亭)이 있습니다. 총석정은 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주위에 현무암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지요. 그래서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많습니다. 특히 정선은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 있고, 김홍도, 이인문, 이재관, 허필, 김하종 등이 즐겨 그렸습니다.
똑같이 총석정을 보고 그린 그림이지만 가장 많이 그린 정선의 작품을 보면 일절 색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수묵만으로 물결치는 파도를 그렸으며 김홍도는 파도소리에 새소리까지 들릴 듯 섬세하고 정감있게 그렸지요. 그런가 하면 초상화를 잘 그린 이재관은 얌전하고 꼼꼼한 모습으로 총석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인문(1745-1821) 은 김홍도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화가로 주눅 들지 않은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해 수채화처럼 총석정을 그렸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화가이든 무명화가이든 나름대로 특징을 살려 그린 총석정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지 모릅니다. 그림에서도 정선이나 김홍도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만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미꽃이나 백합 같은 한두 종의 꽃만 피어있는 정원과 같겠지요. 다양한 개성과 자신만의 색깔로 그린 총석정을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찾아가 파도치는 정자에 서면 붓으로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한 화가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중에서

46세에 1년 내내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에 필요한 그림 그리기에 매달려 걸개 그림 <삼세여래>와 <칠성여래사방칠성>을 그립니다. 47세에 스승 강세황이 죽습니다. 48세에는 아들 김양기를 얻습니다.

52세에 걸작으로 평가되는 <절세보첩>을 그리고 53세에 <오륜행실도>라는 판화를 제작합니다.

1800년, 56세에 정조에게 주자의 시 내용을 여덟폭의 병풍으로 그려 바치며 이 해에 정조임금은 갑자기 죽습니다.

58세에 자신을 농사짓는 늙은이라 쓰며 60세에 처음으로 규장각의 자비대령 화원으로 시험을 치릅니다. 정조의 죽음으로 경제적인 후원자였던 김한태도 죽임을 당하였고 그로 인해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홍도필 추성부도(金弘道筆 秋聲賦圖)

1805년의 끝자락인 동지 무렵에 가로 2미터가 좀 넘게 그린 <추성부도>는 김홍도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대작입니다. 그림 가운데는 한 선비가 둥근 창을 대다보면 앉아 있고, 심부름 하는 어린아이가 한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왼쪽 위에서 아래로 늘여 쓴 글은 1000년 전쯤의 중금 송나라 구양수(1007~1072)가 지은 <추성부>입니다.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구양수가 가을 밤 홀로 책을 읽다가 기묘한 소리를 듣고서 심부름 하는 아이를 내보냈는데, 아이가 뜰에서 허공을 가리키며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어디에도 사람 흔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구양수의 가을과 인생의 슬픔을 말한 내용이 나옵니다. 김홍도는 이 글이 지닌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옛글이 김홍도라는 개인의 사색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서 그림과 하나가 되어 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김홍도는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예견한 것일까요? 이 그림이 제작연도가 분명한 김홍도의 작품 가운데 맨 마지막 것입니다.

출처 :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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