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사람공부 - 옛 그림에서 인생의 오랜 해답을 얻다
조정육 지음 / 앨리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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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인생을 좀 살아보니 문득 허전함이 밀려왔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있다는 허탈함.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되돌아 보게 되면서 고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관심의 영역은 음악, 미술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은 고전이라도 글로 쓰여진 책과는 달리 미술,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현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런저런 입문서를 찾아 읽곤 하였다. 그러다가 알게 된 조정육 선생님의 ‘그림공부, 사람공부’. 더군다나 ‘르네21(http://www.renai21.net)’에서 작가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술작품에 대해서 문외한(門外漢)이지만 그나마 서양화가와 작품이 익숙한 편인데 이 책은 동양화를 다루고 있기에 호기심과 기대가 더더욱 컸다.

드디어 첫시간. 선생님의 열정적이면서도 구수한 입담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재미를 느끼게 하였다. 

동양화에서는 사면(四面)이 모두 막히지 않아야 트인 느낌을 주는데 이경윤의 「관폭도」에서는 폭포가 시작되는 부분에 그려 넣은 작은 바위가 안정감을 주고 있다. 정선의 「어한도」는 먹의 농도를 통해 원근법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홍도의 「씨름」은 사면이 막힌 구도이지만 엿장수 아이의 시선과 맞은편에 그려진 고무신코가 밖으로 향하게 하여 관객의 시선을 그림 밖으로 유도함으로써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하였다.

임웅의 「환선사녀도」와 허곡의 「금어도」에서는 동양화에서만 볼 수 있는, 길게 늘여 쓴 제시와 붉은색 낙관(落款)조차 그림과 어우려져 작품의 완결성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석도의 「산수도」에서는 거칠고 힘찬 붓놀림을 통해 기운생동(氣韻生動)이란 무엇인지, 윤두서의 「자화상」에서는 담채화도 세밀한 묘사가 가능함을 알 수 있었다.  

범관의 「계산행려도」와 마원 「산경춘행도」는 각각 자연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높은 산이 많은 화북지역에서 활동했던 범관은 이 그림을 통해 자연의 웅장함을 표현했다면 강이 많은 중국남부에서 활동했던 마원은 자연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대비되는 작품의 분위기를 통해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작품인 「지옥초지」 중 ‘철애소지옥’, 「지옥도」 등을 통해서는 삶이 유한한 인간은 실존에 대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고민과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들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오늘 한국 기도교인들이 생각하는 지옥의 모습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기독교와 불교의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한국인들의 정성가 두 종교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심사정의 「하마선인」과 김홍도의 「군선도」에서는 그림 밖의 이야기, 상징 쳬계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하마선인」에 나오는 두꺼비는 선인 유해(劉海)를 세상 어디든지 데려다 줄 수 있었는데 가끔씩 우물로 도망가기 때문에 유해가 두꺼비를 동전을 매단 끈으로 유인하는 모습으로 후대에 상서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김홍도의 「군선도」에도 노자, 동방삭 등이 등장하는데 노자는 외뿔소를 탄 모습으로 상징화 된다고 한다. 

이한철이 그린 「김정희 영정」에서 김정희는 마마자국을 한 얼굴이다. 이명기가 그린「채제공 초상」에서도 채제공은 사시(斜視)인 모습 그대로 표현된다. 당대의 뛰어난 명망가들이었던 이들에게 마마자국과 사시는 콤플렉스를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외모를 중시하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감추고 싶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들의 의연함이 돋보인다. 하긴 조선시대 선비에게 학식과 지조는 외모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지 않았겠는가. 감추고 싶은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조정육 선생님께서는 동양화 속에서 여러가지 인생 교훈를 끄집어 내고 있다. 나는 책속에 나오는 작품의 작가들이 어떤 교훈적인 의도를 갖고 작품을 창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술작품은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평가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사실은 내 생각이 아니고 제롬스톨니쯔가 쓴 「미학과 비평철학」에 나오는 얘기다-.  예술작품에 교훈적인 의도가 개입되고 또 그러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느끼는 순간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또 작가를 아는 것이 예술작품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작가와 예술작품은 무관하며 때로는 작가에 대한 선이해와 선입견이 예술작품 감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런면에서 나는 조정육 선생님의 그림공부, 사람공부 중 사람공부는 그분이 나름대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남은 강의를 통해 생소한 동양화를 더욱 많이 감상하고 가까워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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