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 난 시체의 밤
사쿠라바 카즈키 지음, 박재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돈의 노예인가?

우리는 돈의 노예인가?

지금 사는 인생은 얼마만큼 허무한가?

 

제목이 참 무섭고 섬뜩하다.

일본 소설은 좀 독특한 느낌이 있는데 우울하고 허무주의적이거나 너무나 유치하게 밝은 느낌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자에 가까운데 결말이 궁금해서 읽는 내내 그 깊은 우울감과 허무주의적인 분위기에 뭔가 불편했다.

 

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실 세태를 꼬집은 면은 인상적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돈에 대해 무관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돈의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돈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상대적인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정말 내가 갖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 때문에 갖고 싶은 것인가?

돈이 필요할 때, 물건이 필요할 때 본인 스스로에게 자문해 봐야할 것이다.

 

내 마음의 공허함에서 나온 욕심이라면 근본 마음부터 치료해나가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요즘 이 말이 꽤 허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돈만을 쫓아가는 삶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돈이 권력이라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속물처럼은 살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오키상 수상작가의 2011년판 『화차』
지옥이 입을 벌린다, 단숨에 읽히는 작품의 파워!


사쿠라바 가즈키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고 있는 작가로, 『토막 난 시체의 밤』은 나오키상 수상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내 남자』에 가까운 분위기와 문체를 보여준다. 소비자금융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연상시키지만 훨씬 대중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흔이 넘은 번역가 요시노 사토루는 고학생 시절에 하숙했던 진보초의 고서점 ‘나미다테이’의 이층에서 수수께끼의 미인 시로이 사바쿠를 만난다. 빼어난 미모와 어딘가 현실감 없어 보이는 묘한 분위기를 가진 사바쿠! 그녀는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소비자를 현혹하는 ‘대출 광고’에 넘어가 결국 다중 채무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사토루도 대학 강사와 번역가라는 그럴싸한 직함과 명품으로 치장했을 뿐 실상은 빚에 허덕이는 채무자. 그러다 사바쿠가 사토루에게 자신의 빚을 떠넘기려 하면서 비극의 막이 열린다.

● 성형수술, 연예인 대출 광고, 사채의 세계
‘토막 난 시체’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일본 버블 경제의 파탄을 의미한다. 패전 이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제2위의 경제 대국을 자랑하다 이무렵 경기 침체로 허덕이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정확히 이 시점에 해당한다. 소비자금융 전성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등장인물, 그들의 리얼한 ‘현대적 욕망’과 최후를 치밀하고 독특한 구성으로 그려냈다.

“사토루 군. 본래, 돈이라는 것에는 폭력성이 있어.”
“폭력성? 돈에요? 그럴 리가요. 사람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돈 아닌가요?”
“아니, 그렇지 않아. 돈이란 말이지, 없으면 사람을 곤궁하게 만들고, 있으면 있는 대로 질투나 원망을 사게 만드는, 굉장히 성가신 물건이야.”

사토루와 그의 장인어른이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돈의 양면성, 특히 소비자금융의 어두운 이면을 꼬집고 있다. 여주인공 사바쿠는 유명 연예인을 앞세워 소비자들을 현혹하는 ‘대출 광고’에 넘어가 결국 다중채무자로 전략하고 마는데,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유명 연예인의 대출 광고가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해지기 위해 사채에 손을 대다가 결국 인간 사회에서 말살된 성형 미인 사바쿠 같은 인물을 통해 현대 사회의 외롭고도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 단숨에 읽히는 사쿠라바 가즈키의 문장
이야기는 사건 당일 날의 밤이 묘사된 프롤로그에서 시작하여, 제1장에서 제6장까지는 사바쿠와 사토루, 각자의 시선에서 본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나온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사토루의 대학 동기인 사토코, 사바쿠의 엄마와 바람난 상대였던 헌책방 주인 사토가 화자로 등장한다. 에필로그에서는 사건 발생 10년 뒤인 2020년을 배경으로 사토루의 딸이 화자로 나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여러 등장인물의 일상이나 사소한 나날의 변화가 이야기를 서서히 이끌어간다. 그렇게 서서히 전해지는 등장인물의 배경과 이야기의 골격이 독자를 끌어당긴다. 한번 빠지면 단숨에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문체는 나오키상 수상작 『내 남자』에 가까운 편이지만, 등장인물을 냉정하게 다루는 방식은 어느 미스터리 소설에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남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더 이상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괴로운 느낌이 들지만, 읽는 것을 그만둘 수 없는 흡입력을 지녔다. 사쿠라바 가즈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를 쉽게 빠져들게 만드는 도입부, 좀처럼 짐작할 수 없는 사건 전개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 빚에 쫓기는 자의 초상, 가장 탁월한 묘사
『토막난 시체의 밤』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부분은 사바쿠가 소비자금융에 이자를 갚지 못하게 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마치 지옥이 부스스 깨어나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랄까. 눈처럼 불어가는 빚, 그 가공할 위력에 휘말려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 사회에서 말살되는 과정은 탁월하다. 저자가 오로지 이 부분을 그려내기 위해 전 작품을 소모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한번 이자가 밀리기 시작하자, 소비자금융은 엉뚱하게도 사바쿠를 우수 고객처럼 대우한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고, 한번 빚에 쫓기기 시작하자 사바쿠는 소비자금융의 검은 술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자신을 어둠 속으로 내던지고 만다. 그리고 변제 불능과 파산, 인신매매에 이르는 길은 가파르기 그지없는 직벽의 형상이다. 이 지점을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 독자라도 돈의 악마성에 치를 떨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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