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실록 - 능에서 만난 조선의 임금
이규원 지음 / 글로세움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왕릉은 역사와 삶의 축소판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유교이념이 사회점반을 주도했다. 유학에서는 부모를 위한 선대 조상을 실체가 없는 신보다 더욱 극직히 숭모했고, 생사 사를 동일시하여 죽은 선조의 묘를 살아 섬기듯 보살폈다. 따라서 풍수에도 뛰어난 관심을 가졌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족 무덤이 모두 119기가 있다고 한다. 이 중 42기는 왕과 왕비의 능인데, 이중 제릉(태조 원비 신의고왕후)과 후릉(정동과 정안왕후)의 2기만 북한에 있고 나머지 40기는 모두 남한에 있다. 한 성씨로만 500여년 이상을 이어온 단일 왕조는 조선왕조가 세계 역사상 유일하며 왕실의 능이 이렇게 모두 보존되는 경우도 세계 최초라 한다. 따라서 2009년 6월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40기가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한나라의 제왕이었기에 탄생도 특별하겠지만 승하하고서도 능을 쓰는 것에도 특별했다. 특히 영릉은 워낙 명당이라 세종대왕을 이곳에 모신 이후 조선왕조의 운세가 100여년이나 연장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영릉뿐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이렇게 세곳은 명당중의 명당이라 꼽는다. 하지만 왕과 왕비라 할지라도 모두 명당에 모신것은 아니라고 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할아버지 영조를 미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왕을 모시는 능은 명당을 골라야 할진데, 영조는 숙종의 능이 있는 서오릉 안 명릉 가까이 붇히고자 했는데 정조의 명에 따라 현재의 원릉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 원릉은 일찍이 효종을 안장했던 곳인데 능침 석물에 금이 가자 광중에 물이 난다하여 세종대왕릉 곁으로 천장한 곡절 있는 자리다. 자고로 사가에서도 파묘한 묏자리는 지기가 다했다 하여 쓰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미워 기가 다한 자리에 일부러 능침을 조영한 것이다. 아마도 어린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할수 밖에 없었던 한이 그에게는 골수에 파묻였는지도 모르겠다.

 

조선왕조 500년을 왕릉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하니 570여페이지가 되지만 금세 읽을수가 있다. 그리고 조선의 수도가 서울이여서 왕릉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수 있다. 하지만 일생을 서울서 자라서 왕릉이 익숙해서인지 경주의 왕릉보다 낯설지 않다. 어렸을적 '태릉푸른동산'이라고 하면서 소풍을 다녔던 곳을 기억한다. 소풍만 가면 항상 그곳이라고 투덜대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태릉 선수촌"으로 그곳을 더 잘 알고 있을텐데 바로 그곳이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능인 곳이다. 이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유산과 함께 하면서도 우리는 그 중요성을 잘 모르고 지내는 것 같다. 많은 사연을 갖고 있는 왕릉, 공개되어 있는 능도 있고 비공개릉도 있지만 우리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소중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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