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
캐스린 길레스피 지음, 윤승희 옮김 / 생각의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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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종류의 책을 읽게 되면 내 속의 두 자아가 싸움을 한다. 한쪽에선 동물들을 사랑하니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하고, 다른 한쪽에선 어찌 고기를 끊고 세상을 살아갈수 있냐 한다. 최대한 동물복지를 지키면서 키우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요동을 친다. '죽느냐 사느냐'처럼 인생 최대의 난제가 아닐까. 정말로 육식을 비롯하여 유제품까지 끊는 비건은 할 자신이 없다. 물론 나에게 비건이 되라고 아무도 권유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읽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육식에 다섯번 손이 가는 것을 적어도 한번을 줄일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폴 샤피로의 <클린 미트>를 읽었다. 그 책 내용중에서 굳이 우유맛을 나게 인공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를 읽고 났더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젖소는 계속해서 우유를 짜는줄 알았다. 홀스타인종을 그냥 젖소라고 부르는데, 어쩜 이렇게 나는 무지했을까. 사람도 같은 포유동물이거늘. 젖소에서 우유를 짜내려면 여느 포유동물하고 마찬가지로 새끼를 낳아야 한다. 그래서 임신을 하게 하고 송아지를 낳으면 바로 어미와 떨어뜨리고 착즙기를 통해서 우유를 짜내는 것이다. 송아지가 암컷일 경우에는 어느정도 자라면 어미와 똑같은 생을 살겠지만 숫송아지일 경우에는 교배용이든 도축된다고 한다. 낙농업 현장에서는 암소는 필요하지만 숫소는 정액을 채취하기 위한 개체 말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경매현장은 정말로 처절하다. 아직 새끼를 낳을수 있고, 우유를 짤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괜찮은 환경이지만 이제 더이상 필요가치가 없어진 아이들의 경매현장은 정말로 제대로 읽을수가 없었다. 바로 제목에 있던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팔리지 못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 아이가 경매장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그 암소가 자꾸 눈에 아른거려 저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소는 이미 죽어버렸다고 했다. 어쩜 그것이 그 암소에게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경매가 되었다면 그 소는 도축장에서 두려움에 떨며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려동물이라고 하는 아이들은 아프면 치료하고, 살이 찌면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 사료를 먹이고 운동을 시킨다. 하지만, 가축이라는 이름에 갇힌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살이 오를까, 좋은 우유를 생산할까라는 의미의 건강만 생각한다. 똑같은 동물들인데 이 소들은 자연상태에서는 20년이상의 수명을 가지지만 평균적으로 7년이내에 도축당하게 된다. 그 도축 당하는 것 자체도 잠 끔찍하다.


참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 좋을까. 이렇다 저렇다 답을 낼수는 없을것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잡고 비건이 되자 할수도 없겠고 말이다. 인간이 욕심을 좀 덜부리면 되지 않을까. 태어난 송아지가 한달이든 두달이든 어미곁에 남겨두고 그까짓 우유 좀 덜 먹으면 어떨까. 두유로 대체하면 되지 않을까. 조금씩만 육식을 줄이면 그만큼 식용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동물들의 개채수가 줄어들지 않을까.


여전히 내 머리속에서는 두 자아가 싸우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런 책을 읽으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게 너무나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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