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채워가는 시간들 - 그래도 내 생애에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황상열 지음 / 마음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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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열

현재 도시계획 엔지니어/토지개발전문가

직장인이고, 자기계발작가/동기부여강연가로 활동 중이다. 어릴 때부터 드라마, 영화를 즐겨보고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에세이를 읽거나 슬픈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눈물이 나는 감성적인 남자다. 늘 새로운 것을 찾고 들이대는 인생이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찾고 싶은 순수한 사람이고 싶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된 세실님. 이번에 셋째 아이와 함께 책도 출산하셨다. 한 번의 책출산도 힘든 나에게 부럽기도 하고 뒷걸음치고 싶기도 한 도전들을 묵묵히 하고 계심. 아이를 키우고 본업을 하며 내가 살고자 하는 바를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는 길에는 끊임없는 돌부리가 있다. 가장 큰 돌부리는 스스로와의 싸움이고, 현실과의 싸움이다. 그 길을 걸어가며, 이번엔 또 어떤 얘기를 세상에 하고 싶었던 걸까 궁금해진다.

 

무궁화를 타고 가다 보면 몇 번씩 덜컹거리기도 했다. 철로가 합쳐질 때나 분리될 때 그 덜컹거리는 소리가 참 정겨웠다. 자동차보다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갈 수 있고, 길게 늘어선 열차가 달려 나가는 모습도 어릴 때는 신기했다. 무궁화호보다도 더 느리게 가고 모든 역마다 섰던 통일호, 비둘기호도 있었다. 이젠 이 무궁화호가 비둘기호처럼 가장 느린 열차가 되었지만 말이다. p.30

 

나도 결혼하고 거의 영화관을 찾지 못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영화를 즐겨본다. 영화광까지는 아니지만 결혼 전에는 개봉하는 영화는 그날 찾아서 볼 정도였다. 영화 잡지를 구독하면서 정보는 줄줄이 꿰차고 보고 나선 그 감상을 따로 노트에 적을 정도였다. p.45

 

블로그 이벤트에 응모해 작가님의 책을 제공받을 기회를 얻었다. 나에게는 네 살 많은 오빠가 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터울의 오빠와 뭔지 모를 세대차이를 느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 중간지대를 경험했다고나 할까. 지금은 둘다 결혼해 한 가정을 책임지는 부모로서 역할을 하느라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오빠가 중간중간 생각났다. 오빠가 글을 썼다면 이런 글을 썼을까? 본인의 시간들에는 내가 모르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을지.

 

극장에 도착했다. 그 때 극장은 좌석이 꽉 차게 되면 목욕탕에서 쓰는 의자를 통로 쪽에 놓아두었다. 영상시작과 동시에 들어가다보니 원래 있는 좌석은 빈자리가 없었다. 있어도 앉을 수는 없었다. 앉는 순간 통증이 시작되니까.... 오히려 목욕탕 의자가 편했다. 목욕탕 의자를 땡겨서 엉덩이만 걸친 채 허리를 쭉 펴고 다리를 벌린 상태의 자세로 끝까지 우뢰매’4편을 시청했다. 에스퍼맨과 데일리의 액션과 가끔 터지는 심형래식 유머에 아픈 줄을 모르고 봤다. p.47

 

초등학교 시절에 근처에 살던 역 근처에 모라라는 경양식 음식점이 있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내 주위에 양식을 먹어본 게 자랑일 정도로 경양식 최고의 외식이던 시절이다. 입학이나 졸업, 생일 등 특별한 날에만 가던 곳으로 조용하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나오던 경양식 음식점들은 나름 우아하고 격조가 있었다. p.49

 

어느 날인가 아빠 손을 붙잡고 나갔던 오빠는 종이컵의 용도를 다르게 쓰고 있었다. 궁금해하는 나에게 묻지마라며 퉁퉁거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살던 동네는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마을을 휘젓고 다니던 마을버스의 존재가 참 반가웠던.... 막내이모가 첫 월급을 탔을 때 영웅처럼 나타나 칼질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 시절 경양식 레스토랑의 입지는 지금으로 치차면 호텔부페정도 됐으려나... 젓가락과 수저질만 하던 나에게 포크와 칼질은 새롭고도 신기했다. 그 뒤로도 칼질을 하고 싶다면 며칠을 별러 엄마가 데려가 주곤 했는데, 당신껀 빼고 시키는 일관성을 보였다. 요즘은 배부르다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듣고 푸짐하게 주문한 깨적거리는 신공을 내가 발휘한다. ‘이 맛있는 걸 왜 남기냐며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는 엄마. 엄마란 그런 존재인가.

 

남이섬을 처음 갔던 11살이 되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소풍이었다. 말이 소풍이지 극기 훈련 명목으로 4학년 학생 전체가 단체로 가게 되었다. 그 시절도 버스룰 타고 춘천에서 내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갔다. 사람이 많다보니 배가 몇 번을 나누어서 태우고 남이섬에 들어갔다. 먼저 들어간 학생들은 이미 빨간 모자를 쓴 선생님 인솔아래 줄을 서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그 당신 1반이라 첫 배를 타고 들어가서 친구들과 멀리 가는 첫 소풍이란 생각에 떠들다가 선착장에 도착할 때 쯤 빨간 모자 아저씨들이 자 이제 조용히 하고 줄을 맞추어서 내립니다! 여러분은 놀러온게 아니라 극기훈련으로 온 거니 이 조교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하고 소리쳤다. p.56

 

응답하라 1998을 보면 한 시대를 같이 살았다는 일관성이 생각보다 큰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유년의 기억과 20대의 추억이 떠올랐다. 남이섬. 그곳은 겨울연가에 배용준이 나오며 외국인들의 관광지로 급부상된 그곳이 아니던가. 서울 정독 도서관 근처의 모 고등학교 앞에도 배용준 사진을 진열해 놓고 팔던데... 언젠가 남이섬에 갔을 때, 겨울연가 포스터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부삽으로 흙을 떠가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극기훈련.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돌아서고 보니 강압의 문화가 정말 많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왜 단체행동과 규율 폭력들을 의심없이 바라봤던 건지.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맞으며 공부했다면 요즘 아이들은 왜 신고를 안했냐고 묻겠지.

 

작은 체구에 사실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도 했던 생물 선생님은 개구리 한 마리씩 꺼내어 마취통에 넣었다. 개구리가 마취가 되어야 배를 갈라 해부가 가능하다는 건 지난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었다. 한 마리씩 마취통에 들어가 기절하는 모습만 봐도 나는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서 나중에 가져온 2마리 개구리는 그 시절에도 유명했던 황소개구리였다. 보통 개구리보다도 1~2.5배가 크고 작은 개구리도 잡아먹는 잡식성으로 유명한 개구리다. 8마리가 모두 마취통에 들어갔다. 크기가 작은 참개구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했다. 선생님은 6마리를 차례대로 꺼내어 우리 조부터 시계방향으로 한 마리씩 뒤집어서 나눠 주셨다. (……)

황소개구리를 받은 다른 조 친구들도 배를 갈라서 장기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황소개구리가 마취에서 깨어난 것이다!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앞다리가 움직였다. 조금씩 움직이더니 다리에 꽂힌 핀을 뽑아버렸다. 반대쪽 앞다리도 같은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뒷다리에도 힘을 주더니 꽂힌 핀을 다 뽑아버리고 뒤집혀 있는 몽을 다시 돌렸다. p.66

 

원래 개를 무서워하고 싫어해서 개를 키우는 것에 무지 반대했다. 그러나 여동생이 너무 키우고 싶다고 했고, 강아지가 너무 귀여워서 한 번 키워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되어서 이름은 아지라고 지었다. 강아지에서 강만 빼고 불렀는데, 어감이 좋아서 계속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꼭 모습이 영화 그램린에 나오는 기즈모처럼 생겨 정말 귀여웠다. p.77

 

결국 가족회의를 한 끝에 아지를 안락사 시키기로 했다. 따로 살고 일이 바빴던 시기라 여동생과 매제, 아버지가 가서 주사를 맞히고 안락사시켰다. 죽어가는 아지를 보며 여동생은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화장터에 가서 화장을 하고, 안양천변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p.79

 

개구리가 꿈틀거릴 때,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는... 나 역시 미끈거리는 것들, 다리가 많은 것들은 질색이다. 벌레 싫어하고, 어두운 거 질색해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은 꿈도 못꾸는 1. 그런 나도 강아지를 키우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이웃집 강아지가 새끼를 많이 낳았다고 하얀 발바리 한 마리를 선물로 주셨다. 오는 날부터 감기가 걸려 골골 거리던 녀석이 광동탕 골드를 먹고는 기침 뚝. 가족들의 빨래를 베고, 부뚜막에 누워 잠을 청하곤 했다. 부엌에서 칙칙폭폭하는 압력솥의 냄새를 가장 먼저 맡아서 멍멍거리면, 첫 밥공기를 받아 누구보다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에겐 꼬리를 살랑거리더니, 단 둘이만 있으면 어찌나 으릉대던지. 몇 달이 지나자 엄마는 커가던 녀석을 부담스러워 하셨고, 외가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오빠와 엉엉 울면서 매주 강아지 보러가자고 약속했는데, 얼마뒤 가보니 웬 똥개 한 마리가 우리를 보고 짖는데 뒷걸음질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나에게 강아지는 그런 기억을 준다. 6살 첫째도 강아지를 키우자고 자꾸 조르는데 나는 조심스럽다. 아이 둘을 치다꺼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생활은 벅찰뿐더러 누군가에게 정을 들이고 헤어지는 일이 두렵기만하다. 일단은 강아지 인형으로 협상중.

 

1996년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치고 부모님께서 새 컴퓨터를 장만해주셨다. 그 전에 쓰던 컴퓨터는 사촌 누나에게 받은 컴퓨터로 오래 사용하였다. 새로 컴퓨터가 오는 날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밤새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렇게 대입을 준비하면서 남은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오면 그 당신 유행했던 PC통신으로 채팅이나 동호회 활동을 처음 즐겨보게 되었다. p.105

 

누나가 새로 테이프를 사면 공테이프를 하나 사설 더블카세트에 넣어 녹음을 했다. 녹음을 한 테이프는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그때 유명했던 가수들이 박남정, 양수경, 김완선 등 지금은 다 중년을 지나 원로 가수분들이 최전성기를 누릴 때였다. p.109

 

요즘 아이들은 모를 거다.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꼭 리어카 한 대가 있었다. 최신가요 테이프가 빼곡하게 꽂혀 음악을 울려대던... 그때 그 아저씨들은 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테잎아저씨 옆에는 군고구마 아줌마가 커플처럼 있었는데 둘은 얼마나 친했던 걸까.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때 당시 바로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들은 지금도 추억하면 참으로 지분이 좋아진다. 우울할 때나 힘들 때 이 추억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인생을 살아가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살다보니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지금 행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늘 미루다가 그때 가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지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 이 순간순간에 집중하여 즐겁게 행복하게 보내야 한다. p.147

 

부모가 되고서야 부모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나. 불평불만 많았던 엄마아빠의 처사는, 그들도 처음이라 그랬고, 그들도 그들 자신을 어쩔 수 없어 그랬던 거였다. 모든 여건을 갖추고 사는 사람은 없다. 모든 여건이 갖춰지는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이 자리에서 부족한대로 행복하게 살면 그뿐.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과거는 항상 불안하고 후회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오늘을 채우는 것, 오늘 이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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