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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작년에 내내 인터넷 서점에 '오베라는 남자'라는 책이 상위권 순위에 있었다. 밝고 화사한 하늘색 책에 '오베라는 남자'일 것 같은 한 남자의 익살스러운 모습을 증명사진처럼 그려넣은 책. 계속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언젠가 읽어야지라고만 생각하고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작가의 다음 책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신작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이번엔 화사한 핑크색에 장난꾸러기 꼬마숙녀의 그림이 들어가 있는, 사랑스러운 표지다.
이 책의 주인공은 7살 여자아이 엘사이다. 너무도 조숙하고 당돌해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있다. 엘사의 일과는 친구들에게 쫓기기, 얻어맞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놀기. 해리포터 시리즈 중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제일 안 좋아해서 스무 번밖에 안 읽을 정도로 해리포터에 열광하는 소녀이기도 하다.
이혼해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부모님. 원칙주의자인 아빠는 엘사에게 큰 관심이 없고 완벽주의자인 엄마는 엘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엘사에게 기댈 사람은 오직 할머니 뿐이다.
엘사의 눈에 비친 할머니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별 재주가 없다. 규칙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모노폴리 게임을 할 때 속임수를 쓰고, 르노 승용차로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며, 이케아에 가면 노란색 쇼핑백을 슬쩍하고,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을 땐 안전선 밖으로 나와 서 있지 않는다. 볼일을 볼 땐 화장실 문을 닫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엘사는 할머니의 적잖은 결점을 용서할 수 있다.'
이처럼 할머니는 사소한 규칙을 어기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아서 항상 사고를 치지만 누구보다 엘사를 사랑하며 엘사에겐 절대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암에 걸려 결국 돌아가시고 만다.
엘사는 할머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만 애써 태연한 척 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그리우면 할머니의 요술 옷장에 몰래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요술옷장은 예전엔 엘사가 드러누우면 발끝과 손끝이 간신이 옷장 양쪽 벽에 닿았다. 아무리 자라도 옷장은 딱 알맞은 크기였다. 물론 할머니는 ' 이 옷장은 예나 지금이나 크기가 똑같은데 뭔 헛소리냐'고 했지만 엘사가 치수를 재봤다.
엘사는 누워서 있는 힘껏 팔다리를 뻗는다. 양쪽 벽을 건드린다. 몇 달이 지나면 팔다리를 뻗지 않아도 벽을 건드릴 수 있을 거다. 1년이 지나면 여기에 누울 수도 없을 거다. 요술이 모두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이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엘사를 위해 엘사가 자랄 때마다 그에 맞게 조금씩 큰 옷장으로 몰래 바꿔놓았던 것이다. 엘사가 좋아하는 공간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런데 이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옷장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죽음으로써 이 소설은 끝....일 것만 같지만 이 소설의 초반일 뿐 본격적인 내용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할머니가 죽기 전에 보물찾기를 하자며 엘사에게 전해준 편지와 열쇠. 이것으로 엘사는 할머니의 흔적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할머니가 남긴 편지로 인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우리 외할머니를 계속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키워주다시피 보살펴주신 우리 할머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방패막이 되어주셔서 내가 기댈 수 있었던 할머니. 내가 아무리 얼척없는 일을 해도 항상 응원해주시는 할머니. 한없이 넓은 포용력으로 날 대해주신 할머니. 비록 엘사의 할머니처럼 엉뚱하진 않지만 오버랩되는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 할머니는 90세가 넘는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정정하게 살아계신다. 낼모레 마흔인 손녀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저녁마다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 책의 작가인 프레드릭 배크만은 참으로 유쾌하고 유머스러운 필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 느낌을 절묘하고 적절하게 표현한 번역가의 센스도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프레드릭 배크만이란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전작인 '오베라는 남자'라는 책에 대해서도 더욱 궁금해졌다. 5월에 영화화 된다고 하는데 그 전에 책으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