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연금술 - 바슐라르에 관한 깊고 느린 몽상
이지훈 지음 / 창비 / 200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질적 상상력의 전모를 아주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지은이 이지훈 선생의 필력이 장난이 아니다. 물론 학술서의 고답적인 형식과 어투에서 멀찍이 떨어진 재치 만점의 입말에서 읽는이는 오해된 바슐라르 철학, 신화화된 바슐라르의 상상력이론을, 제대로 꼭바로 만나는 흔치 않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바슐라르의 저작들은 많다. 오래 전부터 꾸준히 새번역이 나오고 재출간되고 있다. 누가 뭐래도 불멸의 고전이 된 책들이다. "공간의 시학" "촛불의 미학" "공기와 꿈" "대지와 휴지의 몽상" "대지와 의지의 몽상" "불의 정신분석" "불의 시학 단편" 등등. 지금까지 중요한 저작은 거의가 다 번역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바슐라르가 서양의 철학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상상력이론이 어떤 맥락을 띠는 것인지 다룬 연구서는 전무했다. 오래 전에 곽광수 선생이 "바슐라르"라는 연구서를 낸 바 있으나, 거기 소개된 바슐라르는 이지훈 선생의 책처럼 긴밀한 내적 연관성과 밀도를 보여주는 체계잡힌 단행본이 아닌 소논문들의 모음이었다. 해서 이 책은, 지금까지 국내학자의 손을 거쳐 나온 거의 유일한 바슐라르 연구서라 할 수 있다. 그것도 놀라운 솜씨로 평이하지만 깊이 있게 바슐라르의 학문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연금술 전통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나 바슐라르의 상상력이론을 알고자 하는 사람 모두에서 값어치 있는 책이다. 책의 의미만이 아니라 맛깔스러운 문체와 한눈에 잡히는 책의 구성도 장점이다. 두고두고 아껴서 읽고픈 예쁜 책이다. 바슐라르는 그 느리고 완만한 사유의 방식이 자아내는 매력만큼이나 그의 개인적인 생애, 사적인 삶이 흥미로운 사람이다.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를 다룬 흥미로운 전기를 찾아 번역하지 않는 게 참 이상하다. 우체부에서 시골학교 선생으로, 시골학교 선생에서 프랑스 최고 학부의 교수로 변화해가는 과정이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딸 쉬잔 하나만을 키우며, 시와 몽상으로 자기 연단(練鍛)의 과정을 수행해갔던, 문자 그대로 '삶의 연금술사'로서의 풍모를 드러내는 바슐라르를 다루어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다. 아무튼 다음과 같은 도식이 가능할 성싶다. 바슐라르와 융, 인간의 지적 세계 이면에 숨어 있는 거대한 상상과 신화의 대지, 꿈과 몽상의 대지를 탐사했던 모험가들. 바슐라르와 엘리아데, 낮의 세계(정합적인 학술논리의 세계)와 밤의 세계(정합성이 빛나는 논리 그 너머 꿈과 상상력의 세계)를 오가며 기막힌 균형감각을 보여줬던 진정한 인문주의자들. 이렇게 둘씩 분류해 묶어보면, 바슐라르는 모두에 걸린다. 바슐라르의 품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있다. 하얀 턱수염에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을 한 사진의 이미지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삶을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엄격성과 염결성이 그려진다. 암튼 이 "예술과 연금술"은 바슐라르의 놀라운 미궁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이자, 아드리아네의 실 같은 책이다. 바슐라르에 관심이 전혀 없더라도, 서양전통사상의 맥을 짚기 위해서라도 일독을 권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