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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ㅣ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평점 :
모래바람 X 돌이킬 수 없는 걸음(장화, 홍련 OST)
시간과 공간, 생과 사에 대한 확신마저 몰아치는 모래바람에 의해 희미해지는 메마른 사막과, 몸과 영혼을 짓누르는
후회의 무게- 그에 맞먹는 용인될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죄책감의 고통에 의해 악몽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는 외딴 집.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두 장소엔 돌이킬 수 없는 한 걸음으로 인해 삶의 방향마저 틀어진 두 주인공들이 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내디뎌선 안될 한 걸음을 내딘 <모래바람>의 진구와, 반대로 사랑하는 이의 상실로 향하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내디뎌선 안될 발걸음을 재촉한 <장화, 홍련>의 수미가 그 주인공들이다.
<진구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인 <모래바람>. 작품의 초반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의아해졌다.
작품의 도입부- 진구는 학창시절부터 서로 선의의 경쟁과 지적 자극을 충족시켜주며,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소꿉친구
“연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가 몸담고 있는 기업의 회장에게서 그녀의 치부를 조사해 달라는
질 낮은 의뢰를 받는다. 줄거리에서 보이듯, 단순히 인간의 욕망과 그에 따른 추한 이권 다툼을 핵심적인 줄거리로 다루고
있는 듯 보이는 작품의 제목이 왜 하필 <모래바람>인 것일까. 단지 진구의 과거의 그림자 한켠이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는
사막에 있다는 건 너무 빈약한 근거 아닐까.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민화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 악랄한 계모와
무능력한 가장으로 인해 파국을 맞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모티브로 제작한 영화 <장화, 홍련>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기존 민화의 내용에 약간의 비쥬얼 쇼크만 첨가한 여름철 흔하게 개봉되는 킬링타임 호러 무비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작품에 대한 나의 판단은 모두 섣부른 오판이자 아둔한 편견이었다. <모래바람>은 작품의 제목 그대로,
절망이 모래바람처럼 몰아치는 사막에서 진구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삶과 미래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재앙이 되어
그를 덮쳤고, <장화, 홍련>이란 제목은 옛 민화와 닮아있는 그들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상징하는 첫 번째 장치였을 뿐,
이면에 감춰진 비밀과 진실에 비한다면 많은 이야기들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제목이었다. 결국 두 작품 모두 제목을 통해
감추고 또 드러내며 독자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앞으로 풀어 낼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랄까.
결국 나는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왜 순수한 열정과 충족으로 가득 차 있던 그의 삶이 사막과 같이 건조하고 메마른-
돌이킬 수 없이 황폐해지고 버려진 곳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빛을 품었던 두 대상, 순수한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주었던 "수학"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친구 "연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왜 그들을 과거의 유물로 남겨두고 떠나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는 진구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가
몇 개 나오는데, 그의 독특한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 그 뿌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일화들이 실려있어, 진구라는 캐릭터에 대해 좀 더 심도 있게 파고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다른 것이 틀린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해
진구가 성장하며 타의에 의해 강제로 받아들이게 될 차별과, 그에 따른 고립과 절망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일화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이제는 사막의 모래에 덮여진 그들의 비극이 더욱더 극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수미가 품고 있던 비극이 어떤 모습인지, 그녀의 악몽의 실체가 무엇인지,
자신이 만든 지옥 속에서 심판자이자 죄인이고,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 스스로 지도를 손에 쥐고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진구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은 마치 고향에 돌아가자는 권유를 받고서도 승낙하지 못하는, 고통에 절은 방랑자의 그것 같았다."
<모래바람>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뭔가 잊고 싶은 게 있는데,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은 게 있는데..
도저히 잊지도 못하고 지워지지도 않는 거 있지... 근데 그게 평생 붙어 다녀... 유령처럼"
<장화, 홍련>
사막 속에선 미세한 한 걸음의 틀어짐에도 생과 사를 가르는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걸음이 되고,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 찰나의 판단이 미래를 좌우하듯-진구는 그 한순간, 자신의 선택에 의해 틀어진 방향에 그의 남은 삶을 사막 같은
메마르고 건조한 장소로 만들고 평생토록 헤매게 만들었고, 수미 또한 마지막 기회의 순간으로부터 발걸음을 돌림으로 인해, 스스로의 죄책감이 창조해낸 지옥 속에서 유령처럼 헤매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그 한 걸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