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2

-정치신학; 정치-신학 또는 그것의 계보학


…(도노소 코르테스)는 도크마티호스(δογματιχϖς, 사색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아고위호스(ἀγωυιχϖς, 투사)로서 논하였다.(PT 58)


MC -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Michel Foucault, 이광래 옮김, 민음사, 1987

PT - Politische Theologie, 『정치신학』,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88


1장 주권의 정의

주권과 비상사태 / 주권과 비상사태의 개념적 결합을 위한 예시로서 보댕과 자연법적 국가학에서의 주권개념 / 자유주의적 법치국가 이론에 있어서 비상사태의 무시 / 원칙(규범)내지 예외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 관심이 가지는 일반적인 의미


2장 법형식과 결정의 문제로서의 주권의 문제

국가학에 관한 새로운 문헌들: 켈젠, 크랍베, 볼첸도르프 / 결정에 입각한(기술적 내지 미학적 형식에 대한) 법형식의 특성 / 결정의 내용과 결정의 주체, 그리고 결정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의미 / 결정주의적 사고의 예시로서 홉스


3장 정치신학

국가학에 있어서 신학적 관념 / 법적 개념의 사회학, 특히 주권 개념의 사회학 / 한 시대의 사회 구조와 형이상학적인 세계상과의 일치, 특히 군주제와 유신론적 세계상 / 18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초월적 관념으로부터 내면에로의 이행(민주주의, 유기체 국가학, 법과 국가의 동일시)


4장 반혁명의 국가철학(드 메스트르, 보날, 도노소 코르테스)

반혁명의 국가철학에 있어서 결정주의/ 성악설과 성선설의 대립된 명제의 기초에 있는 권위와 무정부주의 이론 /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지의 지위와 도노소 코르테스에 의한 그 정의 / 정당성으로부터 독재에의 이념사적 발전




슈미트 작업의 가치는 이런 함축적인 발언에서 멈추지 않고 나름의 방법으로 다루는 대상의 다이어그램을 그려나간다는데 있다.


다이어그램 #1. 그 배경과 작도방법 자체


당시 슈미트가 대결하고자 한 상대는 바로 켈젠을 비롯한 법실증주의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결정하는 인격 즉 주권자에 반대하는 이들이다. 슈미트는 입론을 위해 그들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법학적 경향을 설정하는 것에서부터 그의 작도를 시작하는 것 같다. “결정주의적 유형의 고전적 대표자는 홉스이다.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Leviathan』26장이라는데, 찾지는 못했다).’ …권위 대 진리라는 대립은 다수가 아니라 권위라는 … 대립보다도 시원적이며 명확하다. 구체적인 국가주권 대신에 추상적으로 통용되는 질서를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배격하는 결정적인 논점을 제출했다. …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한 쪽의 권력보유자가 다른 권력보유자에게 복종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복종·명령·권리와 권력은 인격의 속성이지 권력의 속성은 아니기 때문이다(『Leviathan』42장, 나중에 찾겠다-_-;;).’(PT 39~40)” 슈미트는 결정과 결정권을 보유하는 구체적인 인격 그리고 그에 의해 행사되는 주권과 법이 실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 이른바 정치신학이라는 전장으로 나아간다. 법실증주의자들이 근거하고 있는 기술적 명확성은 사물적이고 비인격적인 합목적성을 가질 뿐이고 거기에 결정을 모르는 미학적 형식 또한 주권과 법의 형식 즉 정치의 형식이지는 않다.

이어서 슈미트는 세계에 대한 독특한 설명방법 세 가지를 먼저 묘사해낸다. 물질적 과정의 유심론적인 설명 방법, 정신적 과정의 유물론적인 설명 방법, 그리고 사회-심리학적 방법. 앞에 소개한 두 가지는 쌍을 이루고 있다. 두 가지 방법은 인과적 관련을 확인하려는 방법이 서로 대칭적인 꼴을 띄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립을 상정하고 어느 한 쪽을 다른 한 쪽으로 환원시켜서 무화시키는 방법. 이는 결국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를 예정하고 있는 방법이므로 슈미트가 입론을 위해 필요로 하는 방법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슈미트는 투쟁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이고 초월적이며 예정된 정당성 확보를 선언하려는 인물은 아닌 것이다. 나머지 방법에 대해서는 슈미트가 그 누구보다도 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 …수법으로 볼 때, 그것은 가장 적절히 문학의 영역에 할당되는 일종의 사회학, 즉 방법상 … 문학적으로 재기넘치는 비판과 다를 바가 없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 초상화이다(PT 48).”

그는 이러한 방법과는 다른 이른바 ‘개념의 사회학’이라는 방법을 제기한다. “철저한 개념성이라는 이념적인 것이 사회적 현실의 반영인가 아니면 사회적 현실이 일정한 사고 양식, 따라서 행동양식으로서 채택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때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정신적이면서도 실질적인 두 개의 동일물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는 이 방법을 17세기에 적용할 경우 그 목표는 “[a)] 군주제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서유럽 인간의 당시의 총체적인 의식상황에 대응하고 있던 것, [b)]그리고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학적 형태화가 형이상학적 개념과 합치되는 구조를 가지는 하나의 개념을 발견한 것을 보이는 것”이 될 것이라고 밝힌다. 동일성을 띈 거대한 바탕면의 존재는 푸코의 에피스테메 개념과도 닮아있으나 여기서 슈미트는 그가 다룰 범주를 정확히 이렇게 규정하는 것을 통하여 그의 작업이 주권 구성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1). “특정한 시대가 구축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정치적 조직 형식으로서 간단하게 이해되는 것과 그 구조를 같이 한다(이상 PT 49).” 평면 위에 놓인 것 가운데 형이상학과 정치적 조직만을 보겠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그는 그의 입론이 상대를 진정한 것에서 갈려져 나간 파생적인 것으로 다루는 이른바 변증법적인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한 쪽의 일방적 승리를 예정하고 있는 변증법적 논리에는 이러한 바탕면보다는 나선형의 상승하는 면이 존재할 뿐이다. 어쨌든 현실정치와 철학 또는 형이상학은 동일한 바탕면 위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의 다이어그램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그의 결론을 엿보게 될 경우(물론 내가 보기에 마치 선언처럼 그의 결론들은 이 논문의 앞쪽에 배치되어있다)그의 결론들은 분명 거대한 바탕면 자체에 대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명제가 그런 결론 가운데 하나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PT 17).” 누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마저도 이러한 속성을 띄고 있는 주권적 권능을 파괴하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2.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의 이행

홉스는 정치철학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연과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매우 첨예한 수학적 논쟁에도 참여했던 사람이었다(여기서 분노에 찬 홉스는 그답지 않게 오류를 연발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법학이나 국가학에 침투하게 되면 그것들은 인격에 의한 결정이라는 핵심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데, 홉스는 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17세기의 정치와 형이상학 모두가 기초하던 동일성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의 완전한 동일성이 형이상학적·정치적 및 사회학적인 관념들을 관철하고 있으며 주권자는 인격적 단일체이며 궁극적인 발동자로서 요청된다….” 따라서 “최선의 헌법은 단 한 사람의 현명한 입법자가 혼자 생각해낸 작품이다(이상 PT 50).” 리바이어던의 인격성은 홉스가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것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슈미트는 곧바로 18세기 말로 넘어간다. 17~18세기에 신의 개념이 신의 초월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데 반해 18세기 말부터 19세기의 동일성의 평면은 신의 내재성에 기초하고 있다. 헤겔이 좋은 예이리라. 객관적인 것이 세계에는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재성을 전제로 하는 국가를 추출해 내는 것. 이런 헤겔처럼 내재론적 범신론으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거나, 형이상학에 무관심한 실증주의자들의 득세. 따라서 “이제 기계는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즉 이 시기는 자연과학적 일관성이 정치적·법학적 관념 속으로 침투한 시기다. 주권자의 초월적 인격은 소멸되었다. 이것이 루소에게서 민중이 제헌 권력의 소유자가 된 이유다. 또한 민중은 초월적 정당성을 대신하는 또 다른 정당성의 소유자가 된다. 슈미트는 시이예스의 이런 말을 인용해 놓았다. “국민이 어떻게 의사를 만들더라도 의사를 만들면 충분하다. 그 형식은 모두 선이며 그 의사는 항상 최고의 법이다.” 인민 또는 국민이 보유하는 정당성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이어 슈미트의 설명은 결정과 국가적 통일의 양태의 변화로 향한다. “민중으로 표시되는 통일체는 결정주의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이상 PT 51)”한다. 아니 결정이 사실상 필요없다. 인민의 ‘의사는 항상 최고의 법’이므로. 따라서 국가구성의 형태는 정당한 초월적 군주의 명령에 의해 결단되었던 형태에서 국민의 구성과 같은 유기적인 통일체의 구성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그가 공격하는 각각의 논의들에서 드러나는 19세기의 내재성 관념은 다음과 같은 형태들을 띄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동치된 양자는 서로에게 완전히 내재해 있다. 1) 민주주의의 명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동일성 2) 유기체 국가이론: 국가와 주권의 동일성 3) 크랍베의 법치국가론: 주권과 법질서의 동일성 4) 켈젠: 국가와 법질서의 동일성. 이와 같은 내재성의 관념들은 새로운 필연적인 정당성 개념을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1848년의 혁명 이후 모든 국법학은 모든 권력을 인민의 입헌 권력에게 돌리게 되었고, 도노소 코르테스마저도 정당성의 새로운 근원을 의미하는 이 내재성에 굴복할 수밖에는 없었다. “국왕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당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코르테스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즉 독재뿐이다(PT 53).”


동일성의 평면과 근본적 대립


물론 슈미트가 거대한 동일성을 다루었다고 해서 그가 푸코적 의미에서 에피스테메 위에 존재하는 배치들의 다이어그램을 그렸다고 하기는 힘들다. 제일 처음 짚이는 차이점은 동일성의 평면 위에 있는 어떤 것을 다룰 것인지를 지적하는 부분일 것이다. 슈미트는 그가 분석하고자 하는 동일성의 평면 위에 존재하는 것들은 정치와 형이상학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 그가 다루는 영역은 이른바 인문과학의 전 영역이다. 르네상스시기의 모든 학은 물론 근본적으로 신학이다. 고전주의시기의 경우 그가 정리한 영역은 일반 문법, 박물학, 부의 분석이며 이것은 근대에 들어 각각 언어학, 생물학, 정치경제학으로 이행했다. 즉 푸코의 작업대상은 인문과학 전체다. 슈미트는 정치적 영역의 이행에 주목하고 푸코는 훨씬 더 폭넓게 인문과학 전체의 이행에 주목한다.

또 슈미트는 거대한 동일성이 특수한 각 시기별로 형이상학과 정치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이행 과정이 통과해 온 근원적 대립을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슈미트가 그린 이행의 원인은 자연과학적 사고의 관입이다. “자연과학적인 사고의 논리일관성은 정치적 관념들 속에도 침투하고 계몽기에 더욱 지배적이었던 본질적으로 법학적·윤리적 사고를 배척하였다(PT 51).” 슈미트는 초월적 결정권을 윤리적이고 법학적인 사고의 본질적 내용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주권자란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 그리고 “법이념은 자신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형태와 형식을 필요로 하(PT 35)”며, 그 특수한 형태와 형식은 바로 결정이다. “구체적 사실은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PT 37).” 그런데 이러한 주권의 형식은 변화하질 않았다. 단지 정치적 담론의 영역에 자연과학적 사고가 관입되어 주권적 형식에 대해 다른 판단을 하고 있는 존재들이 생겨났을 뿐이다. 어쨌든 이러한 관입 이후 주권을 둘러싼 전쟁의 핵심은 이것을 옹호하는가 아니면 공격하는가가 되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48년까지 있었던 다중의 근본적인 변형이 정치와 형이상학이 기초하는 동일성을 변화시킨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언제나 주권적 결정자는 실존한다. 군주에서 인민으로 이행했을 뿐이다. 슈미트는 주권을 둘러싼 근본적 대립이 1848년 다중의 변형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작업을 실행한 것 같다. 그러나 『말과 사물』에서 푸코는 인간을 둘러싼 영역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근원적 대립 및 그것을 야기한 관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 같다. 즉 인간은 ‘지식의 근본적 배치가 변화된 결과였다(It was the effect of a change in fundamental arrangement of knowledge. MC 440).’ 어쨌든 양측이 다루는 영역은 현격하게 차이가 나며 그에 따라 동일성의 평면 위의 존재들을 밝혀내는 방법상의 유사성은 두 작업의 유사성 그리고 두 작업에서 사용된 이른바 ‘동일성’의 연관성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동일성과 근본적 대립이 존재하고 근본적 대립의 양상이 동일성의 이행과정에 영향을 받아 변하는 모델은 분명 『말과 사물』의 푸코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푸코에게서도 타자와 동일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은 분명히 존재한다. ‘광기의 역사가 타자의 역사 - 문화에 대해서, 타자는 내부적인 동시에 이질적이며, 따라서 배제되어야 하고(내부적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곧 폐쇄되어야 한다(자신의 타자성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 하고 한다면, 사물의 질서에 대한 역사는 동일자의 역사 - 문화에 대해서, 동일자는 분산적이며 동시에 상호 연관적이고 따라서 표지에 의해서 구별되어야 하고 동일성별로 수집되어야한다 - 가 되어야 할 것이다(MC 22).’ 이처럼 『말과 사물』과 쌍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는『광기의 역사』를 더해서 생각해 볼 경우에 타자와 동일자 사이의 대립은 명쾌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타자와 동일자를 가르는 권능의 측면에서 푸코와 슈미트는 만날지도 모른다. 즉 저러한 집행을 위한 결정을 내리는 주권적 층위는 명백히 실존하는 것이다2). 그리고 우리는 앞 문단의 논의에서 푸코에게 존재하는 근본적 대립으로 나아가질 못했기 때문에 에피스테메의 이행에 따라 변동하는 근본적 대립의 실제 양태가 푸코에게도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물론 근본적 대립이 무엇인지에 대한 두 명의 답은 매우 다르며 지성사를 그리는데 있어서 근본적 대립의 위치 또한 매우 다르다. 슈미트의 경우 근본적 대립의 지점인 주권적 권능의 올바른 위치 문제는 무엇보다도 주권적 권능이 어떤 형태에서 어떤 형태로 이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그의 서술을 끌고 가게 된다. 푸코의 경우 근본적 대립은 결국 주권적 권능의 작동에 의해 결정되는 타자와 동일자의 문제이다. 따라서 그가 그려내는 것은 주권적 권능의 이행 형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타자가 되거나 동일자가 되는가라는 좀 더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모두 근본적 대립의 이행 과정을 다루기 위해 어느 정도 지속성을 띈 동일성의 평면들을 추출해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슈미트와 푸코가 각각 제시한 지성사를 다루는 모델은 모두 매우 파격적이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저 근본적인 대립이 나타난 것인가? 그것을 만들어낸 힘들과 그것들의 이행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니체 이래로 우리는 계보학이라 부른다.







-한국어판 26쪽에 있는 '토론‘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담론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게 쓰인 것 같다. “국법학상 이론·개념이 정치적 사건·변화의 인상을 받고 변용될 경우 토론도 우선 현재의 실천적 관념에서 어떤 당면 목표에 따라 전통 관념을 수정하게 된다.” 토론이라기보다는 이는 어떤 언설로 이뤄진 정치적 장을 의미하는 담론이라는 개념을 쓰는게 좋을 것이다. 말 그대로 쌍팔년도 번역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_-;





토론의 반대는 독재이다… 코르테스는 자유주의자를 경멸하지만 무신론·무정부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경의를 표하며 거기에 악마적인 위대성을 인정한다. 그는 프루동을 악마로 여겼다. 이에 대해 프루동은 일소에 부치고, 종교재판에 빗대어 마치 그가 화형대 위에 있다고 느끼기라도 하듯 도노소에게 “점화!"라고 외쳤다(PT 63).



PT - Politische Theologie, 『정치신학』,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88

D - die Diktatur, 『독재론』, 김효전 옮김, 법원사, 1996



슈미트가 생각하는 정확한 국가학적 분석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난 후 남은 문제는 이제 이 논문에서 슈미트가 실행한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과 반동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사실상의 전쟁이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밝혀보는데 있다. 즉 그의 이른바 ‘개념의 사회학’이 어떤 식으로 그가 공격하거나 다루는 대상의 일종의 ‘에피스테메’ 자체의 일치를 다루는가, 그리고 그 위에서 대결하는 것의 형태가 어떤지를 밝혀냈는가에 대해 분석해 봐야 할 것이다.


반동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슈미트가 칭송해 마지않는 도노소 코르테스는 ‘도그마티호스(δογματιχως, 사색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아가위호스(άγαυιχως, 투사)로서 논하였다(PT 58).’ 즉 그의 태도는 ‘모든 관헌에게 복종하는 루터파와 다르다(PT 58).’ 그의 손에서 신학은 다시금 정치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종교재판관의 정신적 후계자에게 ‘너희들의 에히도로스 모두를 사랑하라(마태 5:44, 누가 6:27)’는 ‘너희들의 폴레미오스 모두와 투쟁하라’로 변형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신비적 결합·유추·신탁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슈미트가 이 논문에서 시도한 ‘개념의 사회학’과 닮아있다고 한다. 즉 그는 상대의 형이상학적 핵심이라는 동일성을 파악하고 거기서 무엇이 파생되는지 살피는 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세 카톨릭 체제를 옹호했다는 것 때문에 반동주의자를 낭만주의자로 부를 수는 없다. 낭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원초적 관념이자 형이상학적 핵심인 ‘영원한 대화’는 그들에게 잔혹한 희극성을 띈 환상에 불과하니까. 영원한 대화는 영원히 결정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그 권한을 의회에 의해 제한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7월 왕정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물론 이러한 모순이 모든 존재자의 유기적인 본성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모호한 타협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카톨릭 정치신학자의 생각이리라. 그것은 결정을 유보하는 것을 지지하는 또 다른 형태의 담론. 그는 이러한 타협만을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코르테스는 자유주의를 이렇게 정리한다고 한다. ‘입법부뿐만 아니라 민중 전체가 토론하며, 인간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클럽으로 변하고, 이리하여 진리는 토론을 표결한 결과 저절로 생겨나온다는 것이 정치생활의 이상(PT 63)’이다. 결정적인 대결과 피비린내나는 대결은 의회의 토론이 되고, 결정은 영원한 토론에 의해 영원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 된다. 그의 문제의식인 결정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자들은 정치를 토론과 경쟁으로 환원시키게 된다. ‘토론하는 계급’, 그리고 경쟁하는 계급. 이러한 특성은 자유주의의 결정에 대항하는 형이상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코르테스에게도 그가 경의를 보내는 적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적과 코르테스를 비롯한 반동주의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악마로 취급했다. 슈미트는 그 완전한 적이 완전한 모습을 띄게 된 것은 바쿠닌부터라고 이야기한다. 코르테스와 동시대에 살던 프루동은 아직 가장의 권리나 가족원리를 고수하는 도덕주의적 소시민이라고 한다. 바쿠닌에게서 드디어 신학에 대한 투쟁에 절대적 자연주의의 원리가 도입되는 것이다. 슈미트에 의하면 바쿠닌의 가장 극적인 의미는 바로 생명에 대한 그의 관념에 있다. ‘생명은 자연적인 정당함을 지니며, 자신 속에서 스스로 정당한 형태를 창조한다(PT 64)’.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에겐 인간에게 악의 인장을 찍어댄 신학자들이야말로 오히려 악마다.


쌍방의 대결은 (2-1에서)앞서 살펴봤던 대로 19세기의 정치적 ‘에피스테메’와 국가의 주권이라는 같은 배경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물론 19세기의 정치적 에피스테메만을 어느정도 공유하고는 있는 자유주의라는 관입물과는 경멸과 몰인정의 관계만이 성립된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주권 개념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인 국가라는 배경까지 더해질 경우 본질적으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군주제 자체와 군주적 정당성을 사라지게 만든 초월적인 정치신학의 내재적인 정치신학으로의 이행 또는 초월자의 신민에서 입헌권능을 내재하게 된 인민으로의 다중의 위치 변경이라는 근대의 정치적 ‘에피스테메’ 속에서 카톨릭 정치신학자는 국가 주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가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맞서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신학자들의 말을 곧바로 받아친다. 그것도 저들과 같은 말로. “모든 정부는 본질적으로 독재이다3)1).” 양측은 모두 주권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이 명제를 인정한다.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자이다(PT 17).”이 명제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반동적인 정치신학자들과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다중의 상태 위에서 발동가능한 주권적 권능의 극한인 독재인가 주권의 파괴인가가 이 전쟁의 핵심적인 대립 사항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들 역시 결국 이 전쟁 속에서 전쟁을 결정하는 반-정치신학적 정치신학자이자 반-독재적 독재자라는 점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자유주의적 국가학 공격


1·2장에서 다루고 있는 슈미트 당대의 논적들은 안타깝게도(?) 국가에게서 주권 개념을 배제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타당하다고 이야기하는 자들뿐이었다. 이들과 슈미트는 근원적으로 내재적 권능을 보유하고 있는 다중의 상태에 대해서는 동의할지언정 주권이 국가 내부에서 장악하고 있는 권능에는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투쟁의 종결인가, 아니면 여전히 이어지는 'Bellum Omnium Contra Omnes(Hobbes, Leviathan, 13)'인가? 제헌 권능이 어쨌든 인민에게 내재하게 된 19세기의 정치적 ‘에피스테메’를 제외하면 이들의 공통점은 없다. 이들의 핵심적인 대결 지점은 주권 자체의 유무 또는 국가 내에서의 주권 즉 예외 상태의 원리적 타당성이다.


- 주권의 존재

독재는 비상사태에 맞서 결정과 집행을 행하려는 정치적 행위다. 그리고『독재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따르자면 독재는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로 나뉠 수 있다. 위임적 독재는 현행 법질서 내부에 존재하는 장관의 독재이며 주권적 독재는 입헌권능을 완전히 보유하고 있는 주권자의 독재다. 여기서 주권자임의 특성은 보댕의 논술과 17세기 자연법을 다룬 학자들에게서 추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보댕에게 주권자란 이전의 법률에 구속되지 않고 입헌권능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며, 자연법주의자들에게 국가의 주권이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소멸시키고 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결정하며 어떤 경우에 그것이 파괴되는지를 정의하는 것이다. 즉 ‘법질서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정상적인 상태가 창조되어야 하며, 또한 이 정상적인 상태가 실제로 존재하는 가의 여부를 명확하게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이다.’ 또한 법의 집행에 있어 필연적인 결정하는 자의 존재를 강조하듯 이어서 슈미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법은 상황의 법이다(이상 PT 23).’

예외를 거부하는 합리주의자들에게 결국 예외상태를 선언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 주권자는 그 존재가 거부되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상태를 구별하는 능력 없는 정상상태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리라. 이에 따라 유기체주의는 매우 나이브한 것으로서 기각되게 된다.


- 국가의 주권 즉 예외의 원리적 타당성

크랍베의 법주권론과 같은 논의는 주권의 소재를 인간에게서 합리적 법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에서도 주권개념은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결정을 행하는 예외적인 것이 구체적인 집행자와 질적 차이를 지니고 있는 합리성과 필연성의 법칙 자체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슈미트와 자유주의는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켈젠의 신칸트주의. 그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사회학과 법학의 완전한 분리에서 출발한다. 슈미트는 켈젠을 이렇게 재현한다. ‘국가의 법학적 고찰은 순수하게 법학적인 것이어야 하며 규범적으로 타당한 것이어야 한다(PT 28).’ 따라서 국가는 헌법이다. 여기서 예외를 발동하는 주권적 권능의 자리는 없다. 모든 것은 헌법이라는 최고의 형식적 규범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지정하는 형식적 질서 속에서 통일된다. 슈미트는 이를 예정조화라고 비꼰다. 그리고 실정적 규정의 명령성을 통해 켈젠의 규범적 법학의 체계를 비웃는다. ‘주권 개념은 단호히 배제되어야 한다(PT 30)’고 말해 법 실현의 명령성과 독자성을 무시하는 켈젠은 슈미트에게 호되게 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 크랍베의 법주권론. 앞서 말했듯 이것은 주권의 소재를 규범으로 돌리는 행위이며 켈젠의 신칸트주의적 법학과 닮아있다. 슈미트의 공격은 명료하다. ‘결정은 모든 법적 지각의 일부를 이룬다.’ 그리고 ‘구체적 사실은 구체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이상 PT 37)'. 결정적으로 ’법이념은 자신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형태와 형식을 필요로 한다(PT 35).‘

결정의 층위가 실존한다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고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쌍개념인 숙려와 행동, 그리고 베버의 세 가지 형식개념까지 등장한다. 베버의 형식 가운데 첫 번째는 규범적인 규제처럼 법학적 인식의 선험적 조건으로서의 형식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합리적 훈련을 통한 규칙성이고. 여기서 세 번째의 형식 개념이 등장한다. 합목적성에 의해 지배되는 기술적 형식말이다. 어쨌든 19세기 이후 형식은 객관적인 것으로 이행한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내포한 객관성은 결코 주권적 권능의 소멸을 의미할 수는 없다. 숙려와 행동의 쌍개념을 떠올려보라. 숙려는 법적 규범의 형식에 적합하다. 그러나 행동은 합목적적인 기술적 형식화에 적합하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주권자다. ‘모든 [사법적] 변형에는 권위의 개념이 존재한다(PT 37).’  그리고 주권자의 결정에 의해 ‘무엇이 규범이며 무엇이 규범적인 정당성인가 하는 것이 결정된다(PT 38).' 결국 결정이라는 예외적 형식은 객관성이라는 일종의 에피스테메 위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 슈미트의 논점으로 보인다. 객관성이 결정의 차원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저들의 주장은 결국 부당하다. 독재론에서 인용(D 29)되었던 의결과 집행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별이 다시 인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집행의 본성인 합목적성은 결국 기술적 형식에 따라 이뤄질 때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결정의 층위가 실존한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은 이 논문에서 슈미트가 투사로서 말하는 부분이다. 즉 1·2장과 4장의 기술 방식은 전혀 다르다. 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1·2장의 기술을 4장의 관찰 대상과 같은 것으로 다뤄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형 속에서 1848년 결정적으로 이뤄진 다중의 변형과 함께 객관성이라는 공통된 전제 즉 일종의 에피스테메를 목도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는 분명 다중의 변형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양측 모두에게 당연한 것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의 존재다. 이 위에 양측의 논의 모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슈미트와 자유주의자들은 같은 지평 위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권적인 것의 존재와 예외의 타당성을 밝히는 작업은 그것이 대응하는 작업과 함께 모두 객관성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결의 지점은 그 객관성이 어떠한 구체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가에 있을 뿐이다. 대결 지점은 인격적 국왕과 객관성 사이가 아니라 객관성의 내부에 존재한다.  비인격적이고 규범적인 객관성에 기초한 합목적성인가 집행적이고 기술적인 객관성에 기초한 합목적성인가? 이 전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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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원칙의 토대 없이는 실천투쟁도 모두 무가치하고 무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SR 92).


SR - Sozialrefrom oder Revolution?,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005), 2002년


 

1. 경제 발전과 사회주의

2.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

3. 정치권력의 장악

4. 붕괴

5. 이론과 실천에서의 기회주의

 

 

 

주체의 제거인가 혁신인가?


이제 베른슈타인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로 로자의 공격은 매섭다. 그러나 로자에 의하면 베른슈타인은 망상가이자 난독증 환자에 불과하니 이러한 공격은 매우 정당하다. 베른슈타인은 주식회사로 인한 자본의 사회화경향을 자본의 해체로 오독하여 자본가계급의 실존을 놓쳐버리기도 하고, 사회주의를 빈부격차 해소와 동일시하며 투쟁의지와 계급화 정도 그리고 자본주의의 증가하는 무정부성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인민대중의 총인구의 절반에 못미치는 적은 수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게다가 이미 로크에게서부터 지속되고 있는 노동가치1)와 화폐가치의 연결조차 부정하는 베른슈타인은 무엇에서조차도 차이나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사민주의자들은 로자가 보기에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결국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근간인 근본적 대립을 넘어선 일원론을 주장하며 커밍아웃을 해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라는 레토릭을 즐겨 사용한다. 이 레토릭의 유지를 위하여 베른슈타인에게 사회주의는 역사적인 한 단계에서 추상적인 강령들로 전환되고 마는 것이다.


* 조합주의


이미 베른슈타인의 대안은 명백히 사회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로자는 철저하게 비판을 진행시켜나간다. 이번 공격 대상은 이른바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하여 생산과 소비의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이다. 이미 경제적 민주주의의 한 축인 노동조합의 산업 이윤에 대한 억제력은 완벽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미 1부에서 밝혀졌다. 노조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의 공급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없으며 노동생산성에 대한 개입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위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위상을 위한 러다이트운동으로 변한다(SR 38~41). “임금 법칙은 파괴될 수 없으며 오로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SR 81)” 생산조합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자본주의 시장의 철폐 없는 생산조합은 계급 대립을 초월하기보다는 모든 노동자를 소부르주아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시장의 절대권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본주의 기업의 역할을 해야 한다(SR 79)." 따라서 생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기업으로 변하거나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장을 대체하는 소비자조합이 생산자 조합과 쌍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미 대도시에 거대하게 집적된 인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하여 이 거대한 인구를 소비자 조합으로 조직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화와 서비스의 일반적 교환이 배제된 원시주의적 세계가 아닌 이상 조합주의적 대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2). 조합주의는 우리를 전자본주의적인 원시주의적인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위치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철폐하는 투쟁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관계 속의 게토를 건설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관계에 저항하려는 시도는 원시주의로 향하고 고립되어 궤멸당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시도는 명백히 윤리학적인 정의론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베른슈타인의 사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통찰, 법의식, 의지를 과소평가하는가?(SR 85, 베른슈타인을 인용함)” 이쯤 되면 베른슈타인의 의지 개념은 정의라는 초월적인 척도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속의 신적인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과대망상가운데 하나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세계에 내재하는 유한자인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여물지 않은 인식은 이처럼 심각한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민주의는 현실의 동력학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 민주국가


게다가 베른슈타인은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현대사회 발전의 피할 수 없는 한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로자는 이렇게 대꾸한다.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는 절대적인 내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SR 88).” 로자의 예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남한의 축적과정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시장에 일종의 예외상태가 선포되고 통일된 주권적 권능(대부분 합법적 권능을 소유한 정부다)에 의하여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모습은 명백히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형태를 보여준다.

베른슈타인은 헌법적 차원과 법률의 차원에 대한 구별조차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매우 기초적인 법학적 오류까지도 범하고 있다. 혁명과 법률 개혁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말이다(SR 93). 그리고 입헌권능의 소유자가 변하는 일은 세력관계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 PT계급의 투쟁, 입헌권능의 장악


잠시 멈춰서서 우리는 로자가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보는지에 대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논의에 앞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이 로자에게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앞서 우리는 정의 개념을 단호히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던 로자를 목격한 바 있다(SR 84~85). 이러한 논의에 따라 우리는 로자가 정치를 세계에 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3). 즉 정치적 장은 무조건적으로 세계에 내재하며 그것의 작동은 실재하는 힘관계에 기초한다. 정치적인 것은 초월적인 목표를 가지지도 않고 절대자에 의한 ‘예정조화’를 통해 화합이 이루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매우 유명한 정의는 이러한 내재성과 힘들의 대치에 대한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4)” 국가와 정치적인 것의 동일시의 제거5)는 내전을 일종의 근간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에게는 매우 기본적인 사항일 것이다.

이 힘관계의 스펙트럼은 정복 절대군주제에서부터 매우 민주적인 공화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스펙트럼에 걸친 정치적 공동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공통점은 정치적 공동체가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다. 이 공통되는 능력이 바로 주권이다. 심지어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조직조차도 ‘반-독재적 독재자‘6), 즉 주권자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로자의 민주주의가 정체政體인 한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로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가 어떻게 적과 동지가 되는가부터. 코뮤니스트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전지구적인 내전이라는 점도 추가적 전제로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전상황이 제기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다. 누가 어떻게 주권을 확보하게 되는가?

적과 동지 자체는 명백하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것이 어떻게 규정되는가가 핵심이다. 이것을 연속적인 소득 격차로 환원시키는 것은 정치적인 사회주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힘의 주체다. 한 쪽은 착취하고, 한 쪽은 착취당한다. ·착취율은 잉여가치율과 정확히 같으며7) 잉여가치율은 곧 이윤율이다. 평균이윤율이 0이 될 경우 자본주의는 끝나게 되므로 이 관계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이 근본적인 인식에서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자에게는 착취하는 자는 적이고, 착취당하는 자는 동지인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내전은 결국 주권을 둘러싼 것이며 주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입헌권능을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법이 복종하지만 주권자에게는 복종하는 헌법적 층위를 장악하는 것은 곧 이 내전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렇게 헌법적 층위를 장악하는 것이 정치혁명의 목표임은 분명하다. “대중이 스스로 모든 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야만 하며, 이 의지를 현 사회의 저편으로, 즉 현 사회를 초월해 밀고 나가야 한다는 점에 이 운동의 모든 특수성이 있다(SR 116)."

물론 이는 현재의 국면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운동과 결합되어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 결합에 바로 로자가 그렇게 민주주의를 강조한 원인을 살필 수 있는 단서가 숨어있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첫째,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사회를 변혁시키는 출발점이면서 원칙으로 사용하게 될 정치형태들(자치, 선거권 등)을 민주주의가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둘째,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만, 민주적인 법의 실행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의무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SR 100).” 첫 번째 진술처럼 다양한 전술가운데 하나로 민주주의가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입헌권능을 포기하는 형태가 될 경우 이는 사민주의의 필연적인 실패라는 검은 구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런 입법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권능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두 번째 진술이 바로 우리가 찾던 단서다. 프롤레타리아가 오직 민주적으로만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의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성격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보다도 훨씬 더 집합적이며 거의 전 인구를 포괄할 수도 있다. 이들의 계급적 권력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입헌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과 분리되는 권력의지를 가지는 별도의 주체로서 재탄생하는 전위에게 입헌과정을 양도하여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양도불가능성이 결정의 부재에 의해 이뤄지는 자유민주주의로는 어떠한 혁명에 대한 결정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혁명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집합적이고 민주적인 독재를 통하여 명실상부하게 프롤레타리아가 입헌권능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만드는 정치적 과정이 바로 로자가 말하는 혁명이며 여기서 정치에서 도피하는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극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대중은 이러한 의지를 오로지 기존 질서와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만, 즉 기존 질서의 틀 속에서만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SR 116).”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우리의 로자에 대한 판단은 옳다. “일상적인 투쟁을 위대한 세계 개혁과 결합시키는 것…(SR 116).” 일상적 투쟁은 양도될 수 없는 것들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입헌권능 장악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얼마든지 구체적인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지만 결코 주권적 권능을 장악하는 정치적 과제를 포기할 수는 없다.8) “기본 원칙의 토대 없이는 실천투쟁도 모두 무가치하고 무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SR 92).” 우리는 지금 베른슈타인이 시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민주의의 완전한 패배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잠재성을 제공하는 사민주의의 유토피아성과 사회주의의 잠재적이고 정치적인 실재를 목도하고 있다. 이는 사민주의의 토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파괴되는 지점들에만 존재하지만 사회주의의 토포스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존재론 자체와 연관된 곳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항들은 이미 모두 증명되었다.

 

미주

1) 이는 개인이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한다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노동은 신체의 확대다. "The labour of his body and the work of his hand we may say are properly his." : Locke,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of property, 27(pressed by basil blackwell, 1976).

 

2) 이런 논의가 재생산된 책으로는『파레콘』(마이클 앨버트, 김익희 옮김, 북로드, 2003)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 힘들다. 조합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민주적으로 의결하려고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양태까지도 함께 드러내주고 있는 책이다. 결국 생산조합과 전면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논리적 결말은 “영원한 회의”다.

 

3) 물론 우리는 이에 동의한다.

 

4) Carl Schmitt,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95 : 31쪽

 

5) 같은 책 1장을 보라.

  

6) Carl Schmitt, 『정치신학 外』,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88 : 64쪽

 

7) Karl Marx, 『자본론』,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 287쪽

 

8) 그러므로 로자의 민주주의와 집합적 신체로서의 계급과 그것의 결정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유하려고 하는 신좌파의 급진적 민주주의 사이의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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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개혁과 혁명의 문제, 최종 목표와 운동의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노동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이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SR 13).


베른슈타인은 계급의 관점을 떠나면서 정치적 나침반을 잃어버렸다(SR 109). … 베른슈타인은 시민이라는 말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즉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는데, 실제로 그에게는 인간 그 자체가 부르주아로, 인간 사회가 부르주아 사회와 같은 것이 되었다(SR 112).


SR - Sozialrefrom oder Revolution?,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005), 2002년

E - Empire, 『제국』, Antonio Negri &Michael Hardt,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M - Multitude, Antonio Negri &Michael Hardt, 2004, Penguin Press


1. 베른슈타인의 방법

2. 자본주의의 적응

3.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주의의 도입

4. 관세정책과 군국주의

5. 이론의 실천적 결과와 일반적 성격


이 논문은 1890년대 말에 치열하게 펼쳐진 독일 사민당 내부의 수정주의 논쟁의 판세를 결정지은 뛰어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로자는 베른슈타인과 그의 수정주의를 쁘띠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양태로 간주하며 수정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베른슈타인은 개발살난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의 승리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의 그녀의 정치적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승리한 것은 베른슈타인이었고 로자는 1918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때 우파 민병대에게 살해당해 베를린의 한 운하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녀의 사체는 같은 해 5월에 건져졌으나 그녀의 관점은 1968년에 있었던 1848년 이후에 발생한 다중 최대의 변동이 일어날 때 까지 운하 바닥에 처박혀있던 것 같다.


SR Ⅰ: 적응과 개혁 - 사회주의의 토포스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에서 토포스를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세 가지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몰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경제의 증가하는 무정부성, 둘째 미래 사회 질서의 긍정적 맹아를 창출하는 생산 과정의 사회화의 증대, 셋째 다가올 변혁의 실천적 요소를 형성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증가하는 힘과 계급의식이 그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제거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지주 가운데 첫 번째이다(SR 21).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 혁명의 독특한 토포스를 소멸시키고 그 대신 자본주의의 토포스를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발전 진로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견해가 옳다면, 사회주의적 사회 변혁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로자의 과제는 사회주의 혁명의 토포스를 다시 확립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의 토포스를 사회주의 혁명의 토포스로 배치시켜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주의가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다면, ‘적응 수단’에 관한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이상 SR 25).“


# 자본주의의 영속적 토포스를 둘러싸고


* 적응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적응 수단은 신용,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전, 그리고 자본가 집단이다. 여기서 신용과 통신-교통수단의 발전 사이에는 정확히 비례관계가 성립한다. 통신-교통수단은 근본적으로 고정자본의 규모를 결정하며 이 고정자본의 규모는 근본적으로 총실물경제량을 결정하며 이것은 바로 신용으로 인해 발생하게되는 화폐가치를 포함한 전지구의 총화폐가치가 이루는 무한등비급수의 초항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용을 통한 금융소득의 1투자당 증가율이 100%를 상회한다면 이는 화폐량이 무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 화폐량 역시 무한히 증가하게 되어  물리적으로 제한된 실물과의 연관을 초인플레이션의 형태로 점차 잃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금융소득의 1투자당 평균증가율은 반드시 100% 미만이어야 한다. 그리고 고정자본은 본질적으로 유한하므로 이 경우 총화폐량은 유한하다. 유한수 사이에는 비례가 성립 가능하므로 정상적인 경우 무한등비급수의 초항 즉 총실물경제량 R와 총화폐량 C, 1투자당 평균증가율(=[투자후 금액/원금]-1) I 사이에는 이런 비례가 성립된다. ∴ C=(R/1-I)

물론 I가 1보다 커지는 순간 즉 순수 금융위기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목격한 자본주의 위기는 실현 불가능성에 의한 위기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신용은 생산이 자본으로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게 폭증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신용은 스스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포기되는 것은 역시 신용이다. 채무불이행 선언. 국민국가들의 채무불이행 선언은 그것이 매우 국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세계 금융 질서가 감당 가능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채무불이행 국가의 재건은 세계 금융 질서를 보증하는 결국에는 정치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신용의 근본적 불안정성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신용은 근본적으로 순수 금융위기의 가능성조차 안고 있으며 실현 불가능성에 의한 위기를 촉발시키는 막대한 양의 유동성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는 신용의 유지에 있어 더욱 강력해진 정치적 명령을 목격하고 있다. 생산의 사적 성격과 생산의 사회적 성격 사이의 위기는 전지구적 과두정에 의해 봉합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생산 자본은 신용에 의거하여 사회적이지만 이윤은 자본 이자의 형태로 사유물로 변하게 되며, 소수 금융자본이 중소 자본가들의 생산을 신용에 의거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1).

카르텔은 이윤율 저하경향을 막기 위한 자본들 사이의 연합인데, 이것은 중소기업과 같은 창의적 집단에 의한 새로운 시장의 개척보다는 기존 시장의 일부분에 역량을 집중하여 그 일부분의 이윤율만을 증가시키려는 경향을 띈 조직이다. 이것은 이윤율 저하경향에 의하여 반드시 해체되게 되어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할까? 커뮤니케이션 조직의 완벽화가 가져오는 정보의 편재성으로도 절대로 이러한 불변의 경향을 넘어설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불균등축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이윤율 저하경향을 가속화할 뿐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자본주의의 번영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다. 자본주의가 팽창할 수 있는 세계는 아직 넓다는 점. 이는 다음의 이유와 결합되어 현재에도 유효한 것 같다. 이른바 ‘중소기업의 불굴의 저항(SR 35)’도 그 이유가운데 하나이리라.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저항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동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심화와 더불어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통계적 비중은 본질적으로 하강하게 되어있으며, 따라서 중소기업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발전의 중단을 의미할 뿐이다2).


*개혁

노동조합, 사회 개혁을 통한 사회적 기업의 도입, 국가의 민주화가 바로 우리의 사민주의자들이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내세우는 것들이다.

노조의 핵심적 기능은 ‘특정 지점의 시장가격에 따른 노동력의 판매를 실현시키는 수단(SR 38)’이다. 그러나 노조는 생산에 의한 노동력의 수요와 프롤레타리아트화·사회적 재생산에 의해 이뤄지는 노동력의 공급의 양, 그리고 노동생산성3)에 개입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율의 한계를 정할 능력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 노조가 개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정 가능하다고 사민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생산의 요소에는 오직 생산기술의 결정과 생산규모의 결정 이외에는 없는데, 기술 결정의 경우 임금법칙을 폐지하지 않는 한 개별 노동조합은 노동의 가치를 보장받기 위하여 제2, 제3의 러다이트운동을 벌일 수밖엔 없다4). 생산량의 조절과 그에 따른 제품의 시장가격에 연동되는 임금 역시 매우 반동적인 노동자와 기업의 카르텔을 조직할 뿐이다. 결국 ‘생산과정에 대한 영향력은 차단되어있다.(SR 41)’

베른슈타인은 공장법을 사회주의의 일부로 간주한다. 노동자 계급은 “상승하는” 계급이다. 독일 국가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로 인도한다!(이상 SR 42) 베른슈타인의 동료인 슈미트는 심지어 이런 허무맹랑한 전제까지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소유권을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을 구상한다. 하나는 그가 사회에 부여하는 것으로 좀 더 확대되기를 바라는 상급 소유권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가의 손에 있는 것으로 점점 더 단순한 관리로 축소되어가는 사용 권한이다.” 로자는 곧바로 공격한다. “이러한 구상은 더 이상 전달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순진한 말장난이다(이상 SR 43).” 슈미트의 태도는 일종의 원시주의적 태도라는 것이다. 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힘관계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소유권이다. 다양한 사회적 힘관계가 존재할 때는 소유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고 무엇보다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5)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상품과 겹쳐있으며 이윤의 유지를 그 근본 공리로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권은 회계기술에 의해 뚜렷하게 구별 가능한 이윤부분에 대하여 행사되는 것으로 정확히 정립되었다. 이윤부분이라는 순수 소유가 발생한 것이다. 슈미트의 주장은 순수 소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public)소유와 자본가의 관리라는 표현은 완벽한 넌센스다. 어쨌든 순수 소유를 공격하는 주권적 권능은 순수 소유인 이윤의 존재가 가능한 한 그것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는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에 의하여 반드시 공격받을 수밖에는 없다. 노동조합의 권리와 주식회사에 대한 국가의 관리 등을 포함하는 베른슈타인이 말하는 이른바 ‘사회적 통제(SR 45)’는 이 착취 질서를 규범화하는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로자가 베른슈타인을 완벽히 개발살내는 장면을 구경해보자. “베른슈타인이 공장법에 많든 적든 사회주의적 요소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최선의 공장법에는 거리 청소나 가로등 점등 ― 이것 역시 ‘사회적 통제’가 아닌가 ― 에 사회주의가 스며있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사회주의가 스며들어있다고 그를 확신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SR 46)."

군국주의라는 병리현상은 오늘날 상당부분 그 양상이 변화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군국주의와 관세를 전지구적 자본 실현에 있어 병리현상으로 본 로자의 식견은 이제 전적으로 옳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발언들을 간단히 인용하는 것으로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논의를 멈추겠다. “관세는 … 산업의 카르텔화를 위한 … 수단으로 필요할 뿐이다(SR 48).” “오늘날[19세기 말]… 서로 적대하며 등장한 세력들은 … 바로 동등하게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갈등하게 된 나라들인 것이다(SR 50)." 오늘날 지구상에는 이러한 경향을 지닌 독자적인 광역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2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많다. 사회화와 사유와 사이의 대립에서 우리는 국가의 통제와 사회화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만 지적해 두면 로자의 도식을 현재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에도 어떤식으로든지 명확하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는데 우리는 모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더욱 높은 벽을 세운댜. 이 벽은 사회 개량이 진전됨으로써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서도 약화될 수 없으며 반대로 더욱 강화되고 더욱 높아질 뿐이다. 따라서 이 벽을 무너뜨리는 길은 오로지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길 뿐이다(SR 53).”


*결과: 사민주의와 그 좌초 지점


우리는 아직 19세기 말을 지나고 있으므로 동일성의 평면의 이행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근본적 대립의 존재를 목격할 수 있는 지성사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니체는 당시 잊혀져가고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의 맑스주의자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응용한 경우도 없었다. 맑스와 니체의 최초의 결합은 들뢰즈에 의하여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신좌파의 탄생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계보학적인 작업을 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논문은 당시 갓 50년을 넘긴 맑스주의 내부 논쟁의 날카로운 한 단편이다. 하지만 맑스주의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강한 강도를 가진 대립 지점을 우리는 이 논문이 명백히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급진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대립말이다. “노동조합, 사회 개혁과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 ― 이것이 사민당의 활동 내용이다. 차이는 무엇Was이 아니라 어떻게Wie에 있다(SR 54)."

사회주의로 향하는 초보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을 뿐인 노조 투쟁과 정치투쟁이 가지는 의미는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최종 목표를 삭제한 투쟁이 '취하는 노선은 여러 갈래로 갈라질‘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당연히 직접적 실제결과로 수렴될 것이다. 도대체 자본주의 상황 속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사회 개혁이라는 것이 공허한 구호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사회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의 일상 투쟁 속에 내재하지 않는다. … 더욱 첨예화되는 자본주의경제의 객관적 모순과 사회변혁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의 철폐라는 절대 포기될 수 없는 목표라는 노동자 계급의 주관적 인식에 내재할 뿐이다(이상 SR 57).” 게다가 그의 전술은 모순의 완화에 의존한다. 신용과 카르텔의 생산과 교환관계의 모순 완화,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태 개선과 쁘띠부르주아의 강화를 통한 자본과 노동 모순의 완화, 통제와 민주주의를 통한 계급국가와 사회 간의 모순 완화(SR 58~59). 이러한 모순은 명백히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한 것이므로 자본주의의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전술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사민주의의 배패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은 사민주의의 소부르주아성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개별 자본가에게 위기란 실질적으로 단순한 교란이며, 위기의 종식은 그에게 좀 더 긴 생존기간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신용은 개별 자본가에게 자신의 불충분한 생산력을 시장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수단이다. 또한 개별 자본가에게 자신이 가입한 카르텔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실제로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SR 63).” 이처럼 모순 또는 아포리아의 조건에 대해 철저히 천착하지 않고 그것을 부당하게 회피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독일어 형용사는 '속류적인vulgär'만한 것이 없고, 그에 따라서 이런 소부르주아의 경제학에 쓰라고 맑스는 통쾌하기 짝이 없는 조어인 속류경제학Vulgärökonomie을 만들었나보다. 오늘날 사민주의의 패배는 분명 이러한 속류적 경향 때문이다.

 

 

 

미주

  

1)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생산양식과 수취양식간의 모순,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의 모순(SR 28)은 신용 자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주식회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식회사는 신용과 카르텔이라는 형식이 혼합된 것을 의미한다.

 

2)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번영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두 번째 이유에 따른 것이리라. 즉 포섭은 형식적이지 않고 실질적이다(E 360). 그리고 『제국』의 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포습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위한 잠재력(E 387)’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노동을 저자들은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은 산업 생산에 대한 피드백 작용을 의미하는 토요타주의에서부터 컴퓨터의 조작과 흡사한 상징을 다루는 노동을 거쳐 인간의 정서에 대한 노동인 정서적 노동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주를 포괄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산업의 일반적 형태다(E 381~387). 네그리&하트는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을 공통적인 것(the Commons)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잠재력은 공공의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대립적인  쌍의 존재를 넘어서는 힘이며 동시에 공통성(common)과 단일성(singularity)의 근거이기도 하다. 사적인 것을 억누르고 등장하는 공동체인 res-publica에서 공통성과 단일성 모두를 원리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res-communis로의 이행이 the Commons가 입헌적 힘을 가지게 될 때 발생하게 될 것이다(M 202~208). 따라서 저자들에게 오늘날의 아포리아는 대립쌍들의 반영구적 대치와 위기보다는 공통적인 것이 부패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부패는 공통적인 것이 무한히 미끄러짐을 의미하며 따라서 무한한 혁신을 우리에게 요구한다(E 270~271). 절대적 민주주의 또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사유화가 자본주의이고 이 사유화를 통하여 자본주의는 ‘실질적 포섭’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대한 네그리&하트의 답이자 나의 잠정적인 답이다. 명백히 로자의 시사성은 사회주의 고유의 토포스를 지적하고 그 곳 다중의 성격을 이야기하려는 점이다. 그녀는 독수리의 위대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이미 닭들이 뛰노는 높이로 날아오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힘의 변동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융기 현상 때문이리라.

 

3) 생산성에는 기술수준을 조정하면서 개입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

 

4) 즉 파업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위기를 실현하는 방식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5)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중국 제국에서는 토지의 원칙적 소유자가 황제였으므로 더욱 다양한 관계가 나타나게 된다. 황제가 지주에게 땅을 하사한다(실제 관료들이나 제후들의 토지소유권의 기원은 황제다). 원칙적으로 지주는 10%가량의 토지세를 국가에 바친다. 그리고 지주는 소작농에게 토지의 소작권을 준다. 그리고 수확량의 50%가량을 소작료로 가져간다. 이 경우 원칙적인 수확물의 분배 비율은 국가에게 10%, 지주에게 40%, 소작인에게 50%정도다. 그러나 각종 잡세가 국가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었고 소작세가 7할에 달하는 경우도 있는 등 이러한 단순한 관계와 비율을 중국 제국에서는 오히려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분배비율이 일종의 정치적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회계를 통하여 이윤부분이 다른 지출부분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다뤄질 수 있게 범주화된 경우와 명백히 대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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