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원칙의 토대 없이는 실천투쟁도 모두 무가치하고 무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SR 92).


SR - Sozialrefrom oder Revolution?,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005), 2002년


 

1. 경제 발전과 사회주의

2.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

3. 정치권력의 장악

4. 붕괴

5. 이론과 실천에서의 기회주의

 

 

 

주체의 제거인가 혁신인가?


이제 베른슈타인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로 로자의 공격은 매섭다. 그러나 로자에 의하면 베른슈타인은 망상가이자 난독증 환자에 불과하니 이러한 공격은 매우 정당하다. 베른슈타인은 주식회사로 인한 자본의 사회화경향을 자본의 해체로 오독하여 자본가계급의 실존을 놓쳐버리기도 하고, 사회주의를 빈부격차 해소와 동일시하며 투쟁의지와 계급화 정도 그리고 자본주의의 증가하는 무정부성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인민대중의 총인구의 절반에 못미치는 적은 수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게다가 이미 로크에게서부터 지속되고 있는 노동가치1)와 화폐가치의 연결조차 부정하는 베른슈타인은 무엇에서조차도 차이나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사민주의자들은 로자가 보기에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결국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근간인 근본적 대립을 넘어선 일원론을 주장하며 커밍아웃을 해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라는 레토릭을 즐겨 사용한다. 이 레토릭의 유지를 위하여 베른슈타인에게 사회주의는 역사적인 한 단계에서 추상적인 강령들로 전환되고 마는 것이다.


* 조합주의


이미 베른슈타인의 대안은 명백히 사회주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로자는 철저하게 비판을 진행시켜나간다. 이번 공격 대상은 이른바 경제적 민주주의를 위하여 생산과 소비의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이다. 이미 경제적 민주주의의 한 축인 노동조합의 산업 이윤에 대한 억제력은 완벽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이미 1부에서 밝혀졌다. 노조는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의 공급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없으며 노동생산성에 대한 개입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위치가 전혀 변하지 않는 위상을 위한 러다이트운동으로 변한다(SR 38~41). “임금 법칙은 파괴될 수 없으며 오로지 실현될 수 있을 뿐이다.(SR 81)” 생산조합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자본주의 시장의 철폐 없는 생산조합은 계급 대립을 초월하기보다는 모든 노동자를 소부르주아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완전한 시장의 절대권력으로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본주의 기업의 역할을 해야 한다(SR 79)." 따라서 생산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기업으로 변하거나 해체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장을 대체하는 소비자조합이 생산자 조합과 쌍으로 존재해야 하는데, 이미 대도시에 거대하게 집적된 인구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재화와 서비스에 대하여 이 거대한 인구를 소비자 조합으로 조직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화와 서비스의 일반적 교환이 배제된 원시주의적 세계가 아닌 이상 조합주의적 대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2). 조합주의는 우리를 전자본주의적인 원시주의적인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위치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철폐하는 투쟁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관계 속의 게토를 건설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관계에 저항하려는 시도는 원시주의로 향하고 고립되어 궤멸당하는 수밖에는 없다.

이러한 시도는 명백히 윤리학적인 정의론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베른슈타인의 사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통찰, 법의식, 의지를 과소평가하는가?(SR 85, 베른슈타인을 인용함)” 이쯤 되면 베른슈타인의 의지 개념은 정의라는 초월적인 척도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속의 신적인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과대망상가운데 하나다. 누가 뭐래도 인간은 세계에 내재하는 유한자인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여물지 않은 인식은 이처럼 심각한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사민주의는 현실의 동력학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 민주국가


게다가 베른슈타인은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를 현대사회 발전의 피할 수 없는 한 형태로 간주하는 것이다. 로자는 이렇게 대꾸한다.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에는 절대적인 내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SR 88).” 로자의 예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남한의 축적과정만 봐도 이는 명백하다.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시장에 일종의 예외상태가 선포되고 통일된 주권적 권능(대부분 합법적 권능을 소유한 정부다)에 의하여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이 개시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모습은 명백히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형태를 보여준다.

베른슈타인은 헌법적 차원과 법률의 차원에 대한 구별조차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매우 기초적인 법학적 오류까지도 범하고 있다. 혁명과 법률 개혁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말이다(SR 93). 그리고 입헌권능의 소유자가 변하는 일은 세력관계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 PT계급의 투쟁, 입헌권능의 장악


잠시 멈춰서서 우리는 로자가 무엇을 민주주의라고 보는지에 대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논의에 앞서 우리는 정치적인 것이 로자에게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앞서 우리는 정의 개념을 단호히 허무맹랑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던 로자를 목격한 바 있다(SR 84~85). 이러한 논의에 따라 우리는 로자가 정치를 세계에 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3). 즉 정치적 장은 무조건적으로 세계에 내재하며 그것의 작동은 실재하는 힘관계에 기초한다. 정치적인 것은 초월적인 목표를 가지지도 않고 절대자에 의한 ‘예정조화’를 통해 화합이 이루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칼 슈미트의 매우 유명한 정의는 이러한 내재성과 힘들의 대치에 대한 매우 함축적인 표현이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4)” 국가와 정치적인 것의 동일시의 제거5)는 내전을 일종의 근간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에게는 매우 기본적인 사항일 것이다.

이 힘관계의 스펙트럼은 정복 절대군주제에서부터 매우 민주적인 공화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스펙트럼에 걸친 정치적 공동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공통점은 정치적 공동체가 스스로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다. 이 공통되는 능력이 바로 주권이다. 심지어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조직조차도 ‘반-독재적 독재자‘6), 즉 주권자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로자의 민주주의가 정체政體인 한 그것을 정의하기 위해 로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어떻게 답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가 어떻게 적과 동지가 되는가부터. 코뮤니스트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전지구적인 내전이라는 점도 추가적 전제로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전상황이 제기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다. 누가 어떻게 주권을 확보하게 되는가?

적과 동지 자체는 명백하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것이 어떻게 규정되는가가 핵심이다. 이것을 연속적인 소득 격차로 환원시키는 것은 정치적인 사회주의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힘의 주체다. 한 쪽은 착취하고, 한 쪽은 착취당한다. ·착취율은 잉여가치율과 정확히 같으며7) 잉여가치율은 곧 이윤율이다. 평균이윤율이 0이 될 경우 자본주의는 끝나게 되므로 이 관계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이 근본적인 인식에서 모든 사회주의 정치는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로자에게는 착취하는 자는 적이고, 착취당하는 자는 동지인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내전은 결국 주권을 둘러싼 것이며 주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입헌권능을 장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법이 복종하지만 주권자에게는 복종하는 헌법적 층위를 장악하는 것은 곧 이 내전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렇게 헌법적 층위를 장악하는 것이 정치혁명의 목표임은 분명하다. “대중이 스스로 모든 지배계급에 대항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야만 하며, 이 의지를 현 사회의 저편으로, 즉 현 사회를 초월해 밀고 나가야 한다는 점에 이 운동의 모든 특수성이 있다(SR 116)."

물론 이는 현재의 국면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운동과 결합되어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 결합에 바로 로자가 그렇게 민주주의를 강조한 원인을 살필 수 있는 단서가 숨어있다. “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첫째,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사회를 변혁시키는 출발점이면서 원칙으로 사용하게 될 정치형태들(자치, 선거권 등)을 민주주의가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둘째,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만, 민주적인 법의 실행을 통해서만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의무를 의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SR 100).” 첫 번째 진술처럼 다양한 전술가운데 하나로 민주주의가 쓰일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입헌권능을 포기하는 형태가 될 경우 이는 사민주의의 필연적인 실패라는 검은 구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런 입법은 오직 프롤레타리아 권능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두 번째 진술이 바로 우리가 찾던 단서다. 프롤레타리아가 오직 민주적으로만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의무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성격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보다도 훨씬 더 집합적이며 거의 전 인구를 포괄할 수도 있다. 이들의 계급적 권력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입헌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하며, 이들과 분리되는 권력의지를 가지는 별도의 주체로서 재탄생하는 전위에게 입헌과정을 양도하여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양도불가능성이 결정의 부재에 의해 이뤄지는 자유민주주의로는 어떠한 혁명에 대한 결정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혁명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집합적이고 민주적인 독재를 통하여 명실상부하게 프롤레타리아가 입헌권능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만드는 정치적 과정이 바로 로자가 말하는 혁명이며 여기서 정치에서 도피하는 사민주의와 사회주의의 극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대중은 이러한 의지를 오로지 기존 질서와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만, 즉 기존 질서의 틀 속에서만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SR 116).”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경우 우리의 로자에 대한 판단은 옳다. “일상적인 투쟁을 위대한 세계 개혁과 결합시키는 것…(SR 116).” 일상적 투쟁은 양도될 수 없는 것들이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의 입헌권능 장악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얼마든지 구체적인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지만 결코 주권적 권능을 장악하는 정치적 과제를 포기할 수는 없다.8) “기본 원칙의 토대 없이는 실천투쟁도 모두 무가치하고 무목적적으로 되며,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순간 이와 함께 운동 그 자체도 소멸한다(SR 92).” 우리는 지금 베른슈타인이 시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사민주의의 완전한 패배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잠재성을 제공하는 사민주의의 유토피아성과 사회주의의 잠재적이고 정치적인 실재를 목도하고 있다. 이는 사민주의의 토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파괴되는 지점들에만 존재하지만 사회주의의 토포스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존재론 자체와 연관된 곳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항들은 이미 모두 증명되었다.

 

미주

1) 이는 개인이 스스로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한다는 관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노동은 신체의 확대다. "The labour of his body and the work of his hand we may say are properly his." : Locke,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of property, 27(pressed by basil blackwell, 1976).

 

2) 이런 논의가 재생산된 책으로는『파레콘』(마이클 앨버트, 김익희 옮김, 북로드, 2003)보다 더 좋은 예를 찾기 힘들다. 조합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민주적으로 의결하려고 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양태까지도 함께 드러내주고 있는 책이다. 결국 생산조합과 전면적인 직접민주주의의 논리적 결말은 “영원한 회의”다.

 

3) 물론 우리는 이에 동의한다.

 

4) Carl Schmitt,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95 : 31쪽

 

5) 같은 책 1장을 보라.

  

6) Carl Schmitt, 『정치신학 外』, 김효전 옮김, 법문사, 1988 : 64쪽

 

7) Karl Marx, 『자본론』,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 287쪽

 

8) 그러므로 로자의 민주주의와 집합적 신체로서의 계급과 그것의 결정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유하려고 하는 신좌파의 급진적 민주주의 사이의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타당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