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아름답고 경건한 어둠 속을 계속 걸어갔다.” 이 책 속 산문 <풍경1>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인상을 요약한 문장 같다. 이 인상은 내가 발저에게 늘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저는 계속 걷는 사람이다. 그가 늘 변함없이 산책하는 곳은 그가 거주하는 곳의 숲과 들판, 산과 호수, 강가와 마을이다. 이 장소들은 그의 눈길과 발길이 구석구석 반복해서 닿아 선명하게 빛난다. 따라서 이곳들은 세상 그 어떤 특별한 곳보다 각별한 장소가 된다.


그는 어둠 속을 걷는다. 그가 아무리 찬란한 봄날의 환한 햇살 속을 걸을지라도 그의 속눈썹 아래는 그늘졌다. 눈은 어둠을 보았으며, 마음에는 어둠의 입자들이 떠다닌다. 발저는 장소를 지배하는 “무한한 슬픔”을 본다. 이때 그의 심장과 상상력은 “안개와 잿빛”에 활짝 열린다. 그는 어둠을 안다.


그러나 그의 어둠은 아름답고 경건하다. 그 어둠은 씻기고 씻겨져 말개진 어둠이다. 나는 발저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한참을 눈물 흘린 사람의 말간 시선을 느낀다. 한차례 비를 쏟아 부어 퀭해진 대기 위로 뿌려지는 햇살 같은 맑음. 어떤 시간들을 비워내고 덜어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경건한 광휘. 발저의 어둠은 찬연하다.


발저는 그 어둠을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걷는다. 자기 정화를 통과한 혹은 통과중인 사람의 홀가분함. 이 홀가분함이 그의 문장을 날아오를 듯 가볍게 만든다. 어둠을 아는 발저는 빛의 채도에 민감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주의 깊게” 둘러볼 줄 아는 마음의 폭과 깊이를 가졌다. 사물의 경이를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혼만큼 즐거운 영혼이 있을까. 그 즐거운 영혼은 발저 자신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과 동행한다.


이 책에 포함된 한 에세이에서 발저는 호수 수면에 비친 숲을 바라보는 청년의 입을 빌려 말한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돼. 지금도 우리는 흘러가고 있어. 우리 가슴 속에 더는 정지된 것은 없어. 이제 우리는 갑자기 사랑하게 돼. 그건 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뒤집어엎어 무너뜨린 다음 다시 새롭게 쌓아 올리는 사랑이야”


자신을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흘러간다. “저기 숲이 있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누워 있어. 그렇게 숲은 죽어가. 안녕. 잘 자!” 청년은 이렇게 호수에 드리운 거대한 숲과 구름을 향해 인사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작디작은 것”들의 덧없음으로 이루어졌음을 발저는 소박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놀란다.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 풍경에서 낚아챈 발저의 직관에 놀란다. 이것들을 표현하는 문장의 간결함에 전율한다.


발저의 글들은 매번 이런 방식으로 나를 전율시킨다.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에 포함된 에세이들은 발저에게 성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이 산문집은 그가 산책을 통해 그를 둘러싼 자연 세계를 주의 깊게 바라본 섬세한 인상들로 가득하다. 그가 자연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인식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발저의 오랜 독자라면 특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초록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초록은 무섭고, 섬뜩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이란 타이틀을 가진 산문의 일부분이다. 나는 여러 이유로 여름을 어려워하는데 바로 이 맹렬함 때문이다. 맹렬하고 아우성치고 살기등등한 한 여름의 초록. 지금 내 앞 창문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바로 이 계절의 저 초록. 발저의 <초록>은 이 산문집의 백미이다.


“사랑 같은 무언가가 숲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빛난다.” 숲에 살고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 어린 새들의 합창을 지휘하는 무언가. 이 무언가는 “숲에 사는 침묵의 존재들”이며 “새들의 세계와 우정을 맺는 존재들”이다. 발저는 이것을 그저 “사랑 같은 무언가”라고 부른다. 나는 이래서 발저가 좋다. 이 책을 읽은 나는 그것들을 숲의 영혼들이라고 가만히 불러본다.


“거봐! 고통은 행복이야. 난 숲에서 그걸 배웠어. 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숲에서!” 고통은 행복이야. 고통은 행복이야. 반복해서 읽어본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 숲을 걸어야 했을까. 걸어야 할까. “상처받기 쉬운 인간은” “그저 꿈같이, 부드러운 숨결같이 잠시 피었다 사라질 뿐이다.” 숲 속의 <하이덴슈타인>이라는 바위를 보며 발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으로 걸어 들어간 발저는 자기 내면을 깊숙이 걸어 돌아 다시 숲으로 걸어 나온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것은 모두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숲은 “고통 속에서도 침착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숲은 “자기들 방식으로 시이고 이야기인 미소 짓는 침묵의 형체들”로 분주하고 수다스럽고, 때로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감각을 과감히 열어젖혀야만 숲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발저는 말한다. 숲 속에서 발저의 사유는 오감을 열고 “이리저리 헤매는 나비처럼 아름다운 것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 나비가 무수한 날개를 접고 살포시 내 책상 위에 앉는다. 나는 책날개를 열어 그 나비가 채취한 생의 찬란함과 적막함을 혀끝으로 맛본다. 진한 숲 향기가 전해진다. 차갑고 향긋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작은 숲에서

 

 

여기 작은 숲에서

햇빛은 나를 벌써

스무 해 넘도록 보았다.

무수한 세월이

이 초록빛 공간 위로

흘러갔다.

시간은 가장자리도 경계도 없는데

우리네 짧은 삶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가.

 

(하략)

 

 

한 장소를 수십년 산책을 해보면 느끼게 된다. 나만이 장소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 또한 나를 인식하고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 발저의 이 산문 곳곳에서 발저도 이 느낌을 공유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무도 익숙한 산과 숲, 들을 걷고 있으면 그 장소들의 품에 내가 안겨져 있는 느낌. 그 장소들이 나를 넉넉하게 품고 있다는 느낌. 이 느낌이 강렬해지면 내가 안긴 그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할 수 없는 평온함에 둘러싸인다. 내가 산책을 가장 중요한 일과로 생각하는 이유다. “나는 이제 물결이고, 물이고, 강이고, 숲이다.” , 발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월딩 : 아마존에서 배우는 세계 허물기 이동시 총서 2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근황이 궁금해지는 작가들이 있다. 주류(?) 담론과 정상성에 매몰된 사회의 중심에 날선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 우정을 나눴던 친구가 불쑥 생각나는 것처럼, 이 작가들의 신간 소식과 안부가 가끔 궁금해진다. 김한민 작가도 그 중 한명이다.


그가 신간을 냈다. <언월딩>. 반갑다. “나의 이타카는 아마존이다” 이렇게 서문이 열린다. 김한민 작가하면 이베리아 반도와 페소아가 먼저 떠오르는데, 아마존이라니.


환상을 갖고 출발했으나 환상이 깨진 곳에서 이타카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작가는 쓴다. 아마존에 가졌던 작가의 환상과 그것의 깨짐을 쓴 문장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가 가진 아마존에 대한 상들이 겹쳐졌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착취라는 단편적인 이미지, 남미작가들의 문학을 통해 남겨진 이미지. 그야말로 후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갈 껍데기들뿐인 이미지와 환상. 나는 아마존을 모른다.


“아마존은 개인은 물론 인간이 구하고 말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너무 공감한다. 아마존을 넘어 지구 자체로 확대해도 너무 맞는 말이다. 한낱 인간이 지구를? 지구 입장에서 인간은 제일 골치 아픈 생물 종으로 전락했다. 그런 의미에서 언월딩이라는 책 타이틀이 함의하는 바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타카가 널 부자로 만들어주길 기대도 안했는데

길 위에서 얻은 모든 것들로 이미 풍요로웠으니.”

콘스탄티노스 페트루 카바피스 <이타카> 중, 작가인용.


작가는 “아마존에 대한 환상뿐만 아니라 반환상에도 분투한 결과물”이라고 책을 소개하며 이 책의 여정이 “함께 떠나는 길”이길 바란다고 쓴다. 집 앞 뒤에서 이상 기후의 열기를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우렁찬 매미 소리를 들으며, 이타카로 떠나는 배에 나도 슬며시 승선한다. 출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수한 잎사귀를 품은 숲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했다.

향기로운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꿈을 꾸기 위해.

<숲에서, 145면>


이 시를 나는 이렇게 고쳐 써 본다.

무수한 잎사귀를 품은 이 책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선택했다.

향기로운 문장들 사이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꿈을 꾸기 위해.


발저 시의 한 연을 읽었을 뿐인데 청량한 산들바람이 몸 안팎을 휘감고 지나간다. 발저의 마법이 지나간 것이다. 우리 내면의 명랑하고 맑은 샘물. 발저의 소박한 문장은 그 샘물 위를 스쳐 지나가는 마법의 바람이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 샘물은 돌연 밖으로 찰랑대며 흘러넘친다. 아, 신선한 물의 정령! 숲의 정령이 내 안에 잠들어 있었다. 발저의 문장은 어김없이 그 정령들을 깨운다. 가장 작은 숨결로, 가장 작은 빛의 조각으로.



<전나무 가지,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 푸르고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이 사랑스런 조합의 책 제목은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의 타이틀이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글이 사람의 마음을 갑작스레 환하게 밝힐 수 있는지. 우듬지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 같은 글이다. ‘당신이 만약 지치고, 낙담하고, 슬프다면 이 편지를 읽어보시오’하고, 사려 깊은 발저가 깊은 숲속 키 큰 나무 옹이 사이에 꼭꼭 접어 넣어둔 편지 같다. 발저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지는 화사한 에세이이다.



이제 막 읽기 시작했는데 나는 발저의 그늘지고 울창한 숲으로 성큼 들어와 버렸다. 지글지글 끓는 폭염의 나날, 나는 발저와 함께 사계절 변화무쌍한 숲의 구석구석을 걸을 예정이다. “햇살이 노릇노릇” 걸려 있는 한 낮에도, “만물에 무언가 신성한 것”이 내려앉은 밤에도, “달콤하면서도 차가운” 새벽에도 숲 속을 걸을 것이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빛을 흩뿌려 반짝이게 하는 발저와의 숲 산책이라니. “얼마나 아름답고 기쁜지······”



“나는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아름답고 경건한 어둠 속을 계속 걸어갔다.” (74면)



이 아름다운 책에는 몇 점의 귀한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발저의 형인 화가 카를 발저와 동시대 화가로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페르디난트 호들러의 그림들이다. 발저의 시선과 정신에 담긴 스위스와 독일의 숲과 호수, 산과 대기의 표정과 정서를 간직한 작품들이라 독서의 감흥과 여운을 더해 준다. 인상적인 경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스트 데이즈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하고, 유쾌한, 그러다 돌발적인 도약으로 한 방의 킥을 날리는 제프 다이어야말로 성찰과 유머라는 고난이도의 서커스로 세계를 돌파해가는 작가이다. 그것도 무심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