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리커버) 을유세계문학전집 여성과 문학 리커버 에디션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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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예정된 죽음의 선고,

자타를 투명하게 단련시키는 고통의 연속,

침상을 바라보는 이의 한없는 무기력.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딸의 간병과 상실을 이야기한다.

어머니 프랑스와즈 드 보부아르,

딸 시몬 드 보부아르.



실존주의 철학자,

현대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

소설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딸.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침상 옆에서

비범한 지성을 가진 딸의 눈에

어머니의 삶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삶의 마디마다 느꼈을

혼란과 분열을 딸은 기억한다.



욕망하는 개인과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역할의 한계가 충돌하는 지점마다

어머니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과 언어적 습성들을 딸은 이제야 독해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어머니는 갖지 못했던 언어로

아내, 어머니라는 역할 뒤에 삭제됐던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재현한다.

여성해방선구자로서 어머니를 한 ‘여자’로,

소설가로서 어머니의 ‘삶의 내적 풍경’을,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어머니의 ‘죽음’을 복기하고 기록한다.

통제와 회피, 불화와 갈등,

애증과 침묵으로 긴장된 평행선을 그었던 모녀는

죽음이 벗겨낸 상처와 아집의 자리에

여실하게 드러난 인간의 취약성 앞에서

서로의 삶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네가 보이는구나!’

어머니는 딸에게 임종을 앞두고

여러 날 반복해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의 눈 속에

비친 딸 보부아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기억과 이야기는 남은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어머니 프랑수와즈 드 보부아르’의 삶과

‘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삶은 만난다.

네가 ‘보이기’ 시작하고 (어머니),

엄마의 내면에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성이 살아있음이 ‘보인다’. (보부아르)



죽음이라는 사건이 불러오는 두려움과

번번이 배신당하는 기대, 후회와 자책,

기억과 회한. 그리고 절대적 고독,

이해 불가능의 선으로 넘어가 버린

사건 앞의 절대적 경악.

전면에 드러나는 취약성. 분노.

수용 혹은 평화로운 체념.

죽음은 폭력적인 사건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정의된다.

여기서 죽음은 임종 직전의

진행형으로서의 죽음이자 완료된 죽음이다.


삶을 향한 본인의 의지에 반한

절대적인 추방. 극도의 취약성.

타인의 의지와 의도에 좌우되는 사물화 된 몸.

지극한 순응만이 유일한 선택지인

부조리한 주문서.

죽음이라는 사건은 시기만

다를 뿐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배달되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불평등하고

죽음을 둘러싼 선택들은 폭력적이고 부조리하다.

이 소설에도 현대 의료 시스템의

여러 가지 그늘들이 인물 속 대화로 표현된다.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

당사자, 주변인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파국을 설명하기 힘들다.

감정의 파고는 너무 가파라 설명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서로를 다독여 줄 여유조차 없다.



추측과 짐작 속에 각자의 마음의 파문은

애써 감추고,

이제는 새로운 일상이 된,

하지만 전혀 낯선 일상을 이어간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회오리들은

고통에 지친 체념과 편안한 휴식에 대한

고요한 갈망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잠잠해진다.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은

인간을 벌거벗긴다.


겉치장을 벗어던진 인간들만이

나눌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비애와 연민.

연민은 상대에게 스며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말 없는 약속처럼,

꽃다발이나 화관 없는 장례도 외롭지 않은 이유다.

화려한 장례는 당사자들이 공유하는

존엄한 침묵의 인사를

어쩌면 모욕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그 과제가 언제 주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 간병, 상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보부아르의 문장들은 내면에 상주하는

죽음을 둘러싼 무거운 실루엣에

보다 선명한 윤관을 그려준다.

짓눌리고 뒤엉킨 감정들이

올올히 풀려 설명 가능한 것들이 된다.

감정들을 조금씩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슬픔,

자책과 후회, 더 무거운 죄의식과 회한,

그 모든 감정의 종착지인 무기력.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 감정들은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비애의 무게로

늘 질식 상태다. 그래서 정작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 책 ‘아주 편안한 죽음’은 말을 걸어온다.

죽음과 관련해 우리 안에서

시끄럽게 침묵하고 있는 말들이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이야기임을 납득시킨다.


보부아르가 먼저 말을 조용히 전해준다.

독자라는 위치는 어떤 반응이나 대답을

즉각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얼마나 지혜로운 위로이자 연대인가.

작가란 존재에 대해, 소설이란 창작물에 대해

새삼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길지 않은,

까다롭지 않은 문장들의 글이

어쩌면 이리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지.

각 장, 각 문단, 각 문장들이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정서적 묘사의 과잉 없는 절제된 문장들은

상황과 심리들을 정확히 전달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철학자,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그는 ‘소설가!’였다.

형식과 의미의 낭비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

보부아르의 성정까지 짐작하게 된다. 멋지다.

이 책은 20년 전에 읽은 소설들부터

최근 국내 출간 저서들까지

보부아르의 글들을 다시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성의 삶

가정 ‘내’에서 버려지는 아내,

결혼 관계 '안‘에서 폐기되는 혼인 서약.

가정 안에서 소거되었지만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에 갇혀 가정 안에

머물러야 하는 기혼 여성의 삶,

이 여성이 살고 있는 삶의 모순에 무지한

이들에게 비틀린 신경증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삶. 

폐기된 약속들과 함께 여전히 한 공간에서

남편과 머무르며 욕망을 억누르고

좌절된 욕망들을 딸들에게 투사하고,

여러 방어적인 모습으로 혼란스러운 내면을 드러내는 여성의 삶.

어머니와 딸의 복잡한 심리적 역사,

그리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인 삶과 죽음까지.



반복하지만,

늦기 전에 많은 이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번에 여성과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새롭게 리커버 에디션으로

나온 책의 만듦새가 단아하다.

표지의 그림은 오래된 구리거울의 거친 질감,

옥색 가락지의 여린 단단함.

조개껍질의 찬란한 반짝임을 연상시킨다.

홍지희 작가의 원화는

침묵 속에 아우성치는 여성들의 내면이

시간 속에 응결된 것처럼 처연하게 아름답다.



푸른빛이 고색창연하면서도 화사함이 현대적이다.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은

기억과 과거, 그리고 망자들과의 연대를 약속한다.

누드 제본으로 만들어진 책등도 고전적이다.

표지의 주색인 미색과 홍지희 작가의 그림,

책등의 단정함이 더없이 조화롭다.

현대의 고전이라 불릴 만한 이 책의

가치에 답하는 디자인이다.



사철 제본으로 어디를 펴도 평평하게

펼쳐지는 읽기의 편안함이라니.

보기에도 예쁘고, 문진이 필요 없어 읽기도

편해 이런 제본 방식이 뭔가하고

제본 방법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책 제작의 실무적 조건들이 있겠지만,

많은 책들이 사철 제본 방식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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