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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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진영 소설가의 신작 <이제야 언니에게>,

'이제야' 라는 이름을 가진 미성년자 여성이 성폭행을 당항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제야의 시간은 7월 14일 이후로 멈춰버렸다

어머니는 '이 일을 절대 아무도 알아서는 안된다' 고 말하며

제야의 시간을 함께 멈춰버린다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를 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2008년 7월 28일 월요일



열한살 되면서부터 제야는 하루 두번 일기를 썼다.

하나는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만 보고 간직하는 일기.

보여주는 일기에는 매일 비슷한 내용을 썼고 때로는 거짓을 지어서 썼다.

노트 서너장이 넘어갈 만큼 긴 글을 쓴 날도 있고 간신히 날짜만 적은 날도 있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날에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고 썼다.

노트 한권을 다 채우면 신문지로 감싸서 책장 깊이 숨겼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동안 쓴 일기를 다 꺼냈더니 스무권이 넘었다.

이걸 어쩌지 고민하다가 마당에서 태웠다.

일기장을 태운 날도 일기를 썼다.

어차피 태울 거 뭐 하러 써? 제니가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사니. 제야가 대답했다.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지을 때도 있었다.



주인공 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고향을 떠나 엄마의 고향 친구인 강릉 이모네서 지내게 된다.

<이제야 언니에게>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2008년 7월 14일을 기점으로

제야가 세상에 한 발짝 씩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103p)

이거는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엄마가 말했다.

누구도 알면 안 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제야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당숙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어떻게 엄마와 나만 알 수 있나.

당숙이 아는데, 당숙이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앞으로도 너를 챙기고 책임지고 ...

당숙의 말을 떠올리자마자 공포가 치솟았다.

나한테 또 그러면 어떡해?

네가 조심하면 된다. 우리가 조심하면 돼.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고...

나는 학교도 가야 되고 학원도 가야 되고, 엄마.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그럴 거야.

집으로 올 거야. 나를 찾아올 거라고. 그럴 거라고 했어.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리 없어.

제야는 방을 둘러봤다. 당숙이 바깥에서 모든 걸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내렸다.

엄마가 너무 울어서 제야는 귀를 막았다.

엄마가 너무 울어서, 제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게 왜 그런 데를 가. 집에 바로 왔어야지 그런데를 왜 가서 미친 짓을 당해.

이걸 어디에 말해. 누가 이 말을 믿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뻔하다. 너만 망하는 거야.

제야가 두려워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질책하는 말.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모든게 선명해졌다.

신고할 거야.

제야가 말했다.

잡아가라고 할거야.

***



(114p)

어린애가 별결 다 아네. 그런 건 어떻게 알고 했대?



학생, 생각해봐.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이란 걸 해.

그러면 흔적이 남을 수 밖에 없어.

근데 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잖아. 남자를 때리거나 할퀴기는 했나?

그럼 그 남자 몸에 뭐라도 남았을 건데.

제야는 죽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마비된 것 같았다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116p)

제야는 그럴 수 없었다.

미치고 싶지 않았다.

안전해지고 싶었다.

제야는 눈물을 닦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제야가 말했다.

잘못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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