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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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우리 자신의 무한성을 잃고

유한성안에 우리를 가두고 있다


설령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한들

그것은 그가 느끼는 고통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그때 고통은 의미 없음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의미이다.

지독한 의미이다.

고통은 그저 그의 내부를 향해서만 끝없이 말을 걸고,

그가 그 모든 말을 받아적기도 전에 그의 정신을 찢고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의미 때문에, 그는 아무런 의미도 포획하지 못한다.

그는 활짝 열린 장소에 고립된다.

천희란, 자동피아노

내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이 분열을 중단시킬 수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표지.

그리고 그것을 떠올렸을 때,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그져 견디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나는 우습게도, 죽음을 떠올렸던 것이다.

천희란, 자동피아노

지금부터 너의 분열이 너의 존재를 증명한다.

너는 존재하기 위해 분열한다.

너의 의지로 고통을 향해 간다.

계약의 효력을 유예하려고, 아직 죽음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고통 속에서 망각한 것을 회복하려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 않으려고, 불을 켜서 죽음을 본다.

모든 의미를 빨아들이는 죽음에 분열하는 너의 목서리를 제물로 바친다.

계속해서 무의미해지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천희란, 자동피아노

한 계절이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일.

그리고 기적은, 내가 배우지 않았다면 좋았을 단어

천희란, 자동피아노


이제야 고백건데,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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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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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 쯤은 자신 인생의 전부인듯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무대에 오른 그들을 향해 환호하고 울고 웃으며.

나도 마찬가지다.

무대위에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막연하게 무대에 오르고 싶고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던 시간이

아직 내 가슴 속에 소중히 남아있다.

지금 현재의 꿈도

그들 곁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열심히 달려가고 있을 정도다.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찬란함,

목이 터져라 외쳐야만 한다고 믿었던 사랑이 있다.


조우리 소설 <라스트 러브>는

아이돌 '제로캐럿'의 이야기와 일곱편의 팬픽,

본편과 팬픽이 교차되는 지금 가장 독톡한 소설이다.

무대 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책은 이렇게 일곱가지 무지개색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이사이에 적혀있는 가사 한 구절들은

각각의 다른 색으로 책의 내용이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발문 인용)


국내 연예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실태는 연예인과 팬덤의 관계를 낭만적으로 볼 수만은 없게 만든다.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돌출되어온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문제에는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횡포와 비윤리적 경영, 여성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근래 화제가 된 남성 연예인들의 성범죄와 같은 일 뿐 아니라, 팬덤 자체가 갖는 폭력성도 포함되어 있다. ​ <라스트 라브>를 여성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이야기와 그들의 열성 팬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구성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 이 소설은 파인캐럿의 팬픽에 담긴 애틋한 사랑과 섬세한 성장 서사로 말미암아,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 콘서트를 앞두고 제로캐럿이 마주하고 있는 냉혹한 현실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 그리고 이때 묘사되고 있는 제로캐럿 멤버들의 감정, 즉 자신의 꿈을 실현해나가기 위해 필요에 따라 쓰고 버려지는 시장에 주체성을 내맡길 수밖에 없는 딜레마, 너무 일찍 사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받아 그 세계에 갇혀버린 막막함,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대중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 불안. 끝없는 자기 증명에 대한 강박과 재능에 대한 열패감 등은 아이돌들의 직접 증언을 받아 쓴 현장 리포트로 보이기까지 한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팬픽으로 제로캐럿을 자신이 창조한 존재처럼 다룰 수 있는 파인캐럿 또한 


팬이라는 현실의 자리에서는 다른 팬들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가장 좋아하던 멤버 재키가 없는 제로캐럿을 향한 애정의 정체에 대한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환영이 환영이라는 사실을 꺠달았음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을 떄,

환영은 환영인 그 자체로 현실의 일부가 된다.

이미 현실의 조각들을 아무런 이질감 없이 잇고 있는 환영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나의

나의 우상인 그들에게

나의 꿈을 이끌어주는 

그들에게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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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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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진영 소설가의 신작 <이제야 언니에게>,

'이제야' 라는 이름을 가진 미성년자 여성이 성폭행을 당항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제야의 시간은 7월 14일 이후로 멈춰버렸다

어머니는 '이 일을 절대 아무도 알아서는 안된다' 고 말하며

제야의 시간을 함께 멈춰버린다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를 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2008년 7월 28일 월요일



열한살 되면서부터 제야는 하루 두번 일기를 썼다.

하나는 선생님께 검사받는 일기.

다른 하나는 오직 자기만 보고 간직하는 일기.

보여주는 일기에는 매일 비슷한 내용을 썼고 때로는 거짓을 지어서 썼다.

노트 서너장이 넘어갈 만큼 긴 글을 쓴 날도 있고 간신히 날짜만 적은 날도 있다.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날에는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고 썼다.

노트 한권을 다 채우면 신문지로 감싸서 책장 깊이 숨겼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동안 쓴 일기를 다 꺼냈더니 스무권이 넘었다.

이걸 어쩌지 고민하다가 마당에서 태웠다.

일기장을 태운 날도 일기를 썼다.

어차피 태울 거 뭐 하러 써? 제니가 물었다

어차피 죽을 거 뭐 하러 사니. 제야가 대답했다.



제야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를 묻는 시간.

가만히 앉아서 글자에 일상을 가두는 시간이.

일어난 일을 나열하다보면 불분명하던 감정도 한군데로 고여 어떤 단어가 되었다.

엉켜 있던 생각을 정리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닿기도 했다.

일기를 쓰면서 울기도 졸기도 했다. 미소지을 때도 있었다.



주인공 제야는 당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고향을 떠나 엄마의 고향 친구인 강릉 이모네서 지내게 된다.

<이제야 언니에게>는 그 사건이 일어났던 2008년 7월 14일을 기점으로

제야가 세상에 한 발짝 씩 내딛는 모습을 보여준다.



(103p)

이거는 너랑 나 말고 아무도 알아서는 안 돼.

엄마가 말했다.

누구도 알면 안 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제야는 멍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당숙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어떻게 엄마와 나만 알 수 있나.

당숙이 아는데, 당숙이 너무 잘 알고 있는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앞으로도 너를 챙기고 책임지고 ...

당숙의 말을 떠올리자마자 공포가 치솟았다.

나한테 또 그러면 어떡해?

네가 조심하면 된다. 우리가 조심하면 돼. 절대로 혼자 다니지 말고...

나는 학교도 가야 되고 학원도 가야 되고, 엄마.

내가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그럴 거야.

집으로 올 거야. 나를 찾아올 거라고. 그럴 거라고 했어.

인간이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리 없어.

제야는 방을 둘러봤다. 당숙이 바깥에서 모든 걸 듣고 있을 것만 같았다.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내렸다.

엄마가 너무 울어서 제야는 귀를 막았다.

엄마가 너무 울어서, 제야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게 왜 그런 데를 가. 집에 바로 왔어야지 그런데를 왜 가서 미친 짓을 당해.

이걸 어디에 말해. 누가 이 말을 믿어.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뻔하다. 너만 망하는 거야.

제야가 두려워하던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를 질책하는 말.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모든게 선명해졌다.

신고할 거야.

제야가 말했다.

잡아가라고 할거야.

***



(114p)

어린애가 별결 다 아네. 그런 건 어떻게 알고 했대?



학생, 생각해봐.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이란 걸 해.

그러면 흔적이 남을 수 밖에 없어.

근데 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잖아. 남자를 때리거나 할퀴기는 했나?

그럼 그 남자 몸에 뭐라도 남았을 건데.

제야는 죽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마비된 것 같았다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116p)

제야는 그럴 수 없었다.

미치고 싶지 않았다.

안전해지고 싶었다.

제야는 눈물을 닦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제야가 말했다.

잘못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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