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산 1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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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은 마치 마라톤처럼 아주 긴 호흡으로 완주하는 맛이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건 아직 한번도 그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반부에 거의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박경리의 <토지>를 7권까지 읽은 게 그나마 소기의 성과였달까. 시작한지 5분 내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의 문법에 익숙해져서 인지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해 꽤 긴 숨고르기를 하는 대하소설의 호흡이 나에게 맞지 않나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장길산>을 읽으며 여느 드라마 못지 않은 박진감 넘치는 초입부에 훅 빨려 들고 말았다. 

 

이번에 특별합본호로 새롭게 출간된 <장길산>은 1974년부터 1984년에 걸쳐 연재되었던, 총 10권의 분량을 4권으로 엮었다.

1권 초반부에는 길산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노비였던 길산의 어미는 남편과 생이별 후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만삭의 몸을 이끌고 도망치고, 추노에 쫓기던 중 문화 재인말에서 온 광대패 장충의 도움을 받아 길 위에서 길산을 낳고 죽는다. 이 과정이 얼마나 스펙터클한지, 눈 앞에 한 편의 추격극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그 뒤에는 의협심 넘치는 광대로 성장한 길산이 자신의 편을 한 명씩 한 명씩 끌어 모으고, 어느새 민중의 영웅이 되어야 겠다 각성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은 길산이지만 물주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는 송도 상단의 행수 박대근, 구월산에 터를 잡고 녹림당 화적패를 이끌고 있는 마감동과 녹림당에 합류하게 된 우대용, 김기, 강선흥 등 제각기 다른 매력과 사연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게다가 조선 후기 민중들의 피폐해진 삶이 생생하게 스며들어 있다. 누가 도적인지 알 수 없는 세상. 


"아 그야 뻔한 이치 아니우.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큰 도적질 아닙니까.

벼슬아치들은 권력을 도적질해서 가족과 친척과 저희 연줄로 끼리끼리 해처먹고 허울 좋은 과거까지 독차지하는데다, 이제는 조정에 인재가 끊겨 재주 있는 자들이란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숨어 살지요.

임금님부터 재상까지 화적보다 더 큰 도적놈들이지 뭐요."

황석영 <장길산 1권> p187


길산이 더 큰 힘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감옥에서 부패한 행정 시스템과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몸소 체험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권의 핵심 빌런은 해주 상인 신복동. 그는 해주 선상 임유학을 모략으로 패망시키고, 그의 충실한 도사공 우대용을 살인죄로 만들어 투옥시켰으며 박대근에게도 큰 위기를 안겨줬다. 이 때문에 길산 역시 관군에게 붙잡혀 처형을 기다리는 몸이 되는데, 길산은 신복동은 물론 그와 결탁한 부패한 관리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이 가진 힘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을 한다.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길산은 구월산 풍열스님의 소개로 금강산에서 천민 세력을 모으고 있는 운부대사를 찾아 수양을 떠난다. 앞으로 구월산의 녹림당이 얼마나 더 큰 세력으로 성장해나갈지를 보여주는 복선 같다.

 

한편 러브스토리도 이 서사의 큰 줄기를 담당하는데, 길산의 운명적 여인 묘옥이다. 그녀는창기 출신이지만 굳은 절개를 가진 단단한 여성으로 길산을 연모하며 자신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연비를 새긴다. 하지만 길산이 옥에 갇혀 사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자 묘옥은 재인말을 떠나 안성 사당패에 합류하고, 자신을 깊게 사랑해주는 여주 도장 이경순을 만나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정의로운 영웅의 성장기와 닿을 듯 말듯 안타까운 러브스토리의 조합이라니 안 재밌을 수가 없는데, 마치 그 시절 광대에 빙의한 듯한 우리 가락들이 당시 민중들의 한스러운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거칠고 날 것 같은 언어들에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남의 것을 빼앗으며 패악 밖에 남지 않은 민중들의 비참함이 스며들어 있다.


"길산이 옥에서 달포를 지내는 중에 문득 설움받는 백성의 삶을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헌헌장부로 되어진 지금까지 받은 온갖 수모는 자신이 오직 천출 광대이기 때문이려니 하여 세상의 귀천과 빈부를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남칸 살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숱한 사연을 보고 듣는 가운데, 일찍이 박대근과 초대면하여 그가 포부를 말할 적에 느끼지 못했던 점이 이제 와서 환히 보이는 듯하였다.

지금까지 자기가 무턱대고 관원께 느끼던 적개심이나 양반 호족들에게 가졌던 원한은 얼마나 우직하고 무모하였던가를 알았다.

이제부터는 보다 더욱 지혜롭게 더욱 강하게 되어야만 할 것이다."

황석영 <장길산 1권> p411 / 창비



더 큰 뜻을 품고 길을 나선 길산, 그는 얼마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일단 신복동부터 해치우게 되려나? 아님 신복동 보다 더 거대한 빌런이 등장하려나?

온갖 기대를 품고 다음권을 향해본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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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사람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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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정겨움과 함께 팍팍한 현실도 담고 있을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한 시골 소설이라는 소개에 마음이 끌린다. 위트와 해학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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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클래식 - 하루의 끝에 차분히 듣는 아름다운 고전음악 한 곡 Collect 2
김태용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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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은 왜그래>에서 너무 쉽고 재밌게 클래식을 알려주셔서 완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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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
벤 윌슨 지음, 박수철 옮김, 박진빈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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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세계적 도시들의 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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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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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어두운 이면이라니, 항상 인간의 어두움을 통찰력 있게 파헤친 엘레나 페란테라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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