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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휘청이는 개개인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그때는 다들 어려웠지'라고 회고하는 생존자들의 어투에는 당시의 비참함이 면포를 두드려 수분을 거둬낸 것처럼 말라있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훑는 위화의 소설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이 한 편의 희비극처럼 펼쳐진다. 선혈이 낭자하고 진물이 흐르는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담담하면서도 보폭이 빠른 문체는 언뜻 해학적이기까지해서 비극의 수렁에서 나를 한발 떼어내지만 뒤이어 몰아치는 극적 상황에 와서야 가슴 깊이 슬픔을 남긴다.
8년 만에 나왔다는 위화의 신작 <원청>. 소설의 배경인 1900년대 초는 나라가 바뀌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기였다. 청나라가 저물고 새로운 중국이 세워지느라 진통을 겪던 시기, 무정부 상태에 놓인 소시민들은 마을 수시로 토비들과 패잔병의 야만적인 수탈 속에 고통 받는다. 이들이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반인륜적인지 소설 속에서는 허언증 걸린 자의 무용담처럼 읊고 있지만 아마도 어느정도는 실제 일어난 일일거라 생각이 드니 너무나 끔찍해서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딸을 낳고 도망 간 아내를 찾기 위해 이름 밖에 모르는, 존재하는지 조차 점차 믿기 힘들어지는 도시 '원청'으로 닿기 위해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길을 나선 남자 린샹푸. 부모를 일찍 여의었을 뿐 충직한 집사도 있고, 가산도 번듯한 마을 지주였던 그가 고작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모든 것을 두고 고생길에 올랐을 때, 그의 미련함이 어떻게 전개될 지 너무나 궁금했다.
결국 그는 '원청'에 가지 못했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였으니까. 그러나 아내와 비슷한 말씨를 쓰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 시진에 정착하게 되고, 가난했지만 린샹푸 부녀를 극진하게 대해 준 천융량과 상인회 우두머리 구이민과 영원한 우정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평온하던 시절이 가고,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린샹푸의 소중한 딸 린바이자가 토비에게 납치 되고, 전쟁에서 패한 북양군이 민가를 잔혹하게 약탈하며 시진으로 몰려오는데.
전란 속에서 고통받는 소시민들의 이야기가 중국인 특유(왕서방st)의 과장과 해학으로 전개되는데, 린샹푸 역시 이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린샹푸의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반전으로 뒷통수를 얼얼하게 만들기도 한다.
두꺼운 벽돌책을 몰아치듯 다 읽고 난 후에는 역시 중국 3대 작가라는 타이틀은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중국 역사가 낯설더라도 절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책이 두껍다고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위화는 이 두꺼운 벽돌책을 후루룩 읽히게 만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가슴엔 먹먹함이 남는다.
<허삼관 매혈기>에서 만난 순박한 촌부의 절절한 부성애가 이번에는 우직하고 묵직한 거인 같은 남자로 재현되는데, 제목 때문일까? 이야기가 휘몰아치다가 끝내 옅은 안개 속에 놓인 듯 아스라한 느낌을 남겼다. 이런 게 닿을 수 없기에 항상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 희망 같은 느낌이려나? 언제 그토록 열망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에는 짙게 낙인처럼 남아있는 어떤 기억 같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