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역사 - 시대를 품고 삶을 읊다
존 캐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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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단테의 <신곡>을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숱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단테가 창조한 세계- 지옥, 연옥, 천국. 이 위대한 서사시를 죽기 전에 당연히 읽어봐야하지 않나 싶어 호기롭게 책을 샀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이해력이 미천해서인지 책은 너무나 지루했다. 게다가 단테라는 사람의 사적인 복수가 잔뜩 담겨 있어서 도대체 이게 무슨 문학적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임을 위한 강제 독서가 아니였다면 이미 초반에 책을 덮었을 것 같은, 나에게 고전이란 무엇인가하는 의문만 남긴 책이었다.



옥스포드 대학교 명예교수인 존 캐리가 쓴 <시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 불리는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문학적 경계를 넘나드는 시를 보여주는 현대 시인들까지 방대한 시의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시가 가진 의미와 시인에 얽힌 뒷이야기를 읽다보면 꽤 두꺼운 이 책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된다. 각 챕터가 대부분 5~10페이지 내외로 짧아서 늘어지지 않게 딱 적절한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문학 전공이 아니어도, 해당 시를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내게는 형식부터 낯설고 잘 읽히지 않는 서사시들- '길가메시 서사시', '일리아드', '오딧세이아', '변신이야기' 등등을 설명해준 초반 부분이 흥미롭고 재밌었다. 전쟁, 모험, 신화가 버무려진 대서사시의 스토리들은 스케일이 크고 환상적이었다. 여기에 저자는 자신의 감상과 비평가들의 평가를 적절하게 가미하는데, 단테의 '신곡'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너무나 공감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을 통틀어 단테 알리기에리만큼 현대 독자에게 호소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찾기 어렵다. 단테의 시가 속속들이 중세 신학에 젖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그의 믿음이 우리의 반감을 유발하기 일쑤라서 그렇기도 하다. 단테는 인간으로서의 매력도 없었다. 복수심이 강하고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p45)




게다가 저자는 신곡 속에 등장하는 여성- 단테의 첫사랑이자 뮤즈인 베아트리체가 천국의 안내자로 등장한다-은 명예롭게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온전한 여성성을 박탈 당한 존재라 꼬집고, 여성 육체에 대한 혐오도 깃들여있다고 지적한다. <신곡>이 너무 싫었던게 이해가 됐다.



그런데 왜 '신곡'이 여전히 위대한 고전에 꼽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그가 창조한 사후 세계가 너무나 창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저자는 후대의 예술가들이 <신곡>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고 말한다. 낭만주의와 라파엘전파, 20세기 초 T.S. 엘리엇과 에즈라 파운드 등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들- 셰익스피어, 말로, 시드니의 시들은 사실 이들의 시를 처음 접했는데 여전히 낭만적이고 너무 아름다워서 놀랐다. 


하지만 위대한 시로 칭송받는 시들을 저자는 덮어놓고 찬양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평을 하는데, 또 이게 이 책의 굉장한 재미 포인트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시와 희곡이 '추상명사들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진짜 행동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상상력은 자극을 받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각화해 떠올릴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적한다. 말은 아름답지만 사실 구체적인 시각화가 안된다는 것, 책 속에 시들을 읽으며 느꼈던 묘한 부분에 정곡을 찌르고 있어 놀랐다.



책은 대체로 영미 시를 다루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시도 언급한다. 서양의 자연시보다 초점이 더 선명하고, 사랑보다 우정을, 열정보다 고요, 성찰, 자기분석을 표현하는 중국시. 반면 보다 감정을 담아 관능적인 표현한 일본시. 이런 시들은 아서 웨일리와 에즈라 파운드를 통해 영미에 전해졌는데 그들의 시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지즘이란 사조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한 권에 알차게 담아낸 '시의 역사'는 평소에 시를 거의 접하지 않는 나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책 속에 수록된 시들이 가진 은유적인 표현이 너무나 독창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기괴해서 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켜주었다. (게다가 책의 기획과 구성이 좋아서 소소의 책 출판사에서 나오는 역사 교양서가 이와 같다면 모두 모으고 싶다는 뽐뿌도....)



시에 문외한이라도 전혀 접근하기 어렵지 않은, 그렇지만 읽고 난 후 앎의 세계가 확장되는 역사 교양서였다.



 ※ 컬처블룸을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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