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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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말했습니다...

나는 물 속에서 살기에 당신에게는 내 눈물이 보이지 않아요."

왕쉬안 <물고기가 묻다>




아이에게는 울음은 강력한 자기 표현 수단이다. 생리적인 욕구부터 슬픔과 분노 같은 감정을, 아이는 세찬 울음으로 쏟아낸다. 이런 울음에 어른들은 즉각적으로 응답해준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생리적인 욕구 때문에 남 앞에서 운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슬픔과 분노도 홀로 삭혀야 한다. 마치 물 속의 물고기가 된 것처럼 우리의 눈물은 타인에게 가닿지 않는다.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인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류>는 한 남자의 성장담이다. 1975년 타이베이, 열일곱살이었던 예치우성은 그 해 두 번의 큰 죽음을 맞는다. 국부로 불리던 남자 장제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을 너무나 아껴주던 할아버지 예준린의 죽음이다. 



국공내전 중 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가담했던 국민당 군인이었던 할아버지는 타이베이로 이주해 온 후 포목점을 운영해왔다. 포목점 운영은 순조로웠지만 전쟁 중 연을 맺은 의형제들과 그 가족, 고아들에게 퍼주느라 그의 가족들은 언제나 팍팍한 삶을 살아야했다. 할아버지는 전우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 피도 나누지 않은 삼촌 위우원을 자신의 친아들보다 예뻐했다. 그런 의리 있고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살해 당했다. 원한에 의한 살해일 것이라는 추측이 오가고, 예치우성은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할아버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나름 모범생 축에 속했던 예치우성의 삶도 죽마고우인 샤오잔 때문에 완전히 꼬여버린다. 대리 시험을 치다 퇴학을 당하고, 불량아들만 모아둔 고등학교로 울며 겨자먹기로 재입학한 그는 세상의 폭력에 완전히 노출되어 맞거나 때리거나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그때부터 샤오잔과 멀리 하면 좋았겠지만, 의형제의 의리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는 할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동네 조폭과 어울리는 샤오잔과 얽히다가 예치우성의 인생은 더욱 꼬여버린다.


주인공의 학창시절이 활극처럼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애틋한 첫사랑도 시작된다. 하지만 인생의 좌절과 실패, 이별은 금세 그를 찾아온다.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잃어가며 예치우성은 점차 마음 속 뜨거움이 사라져가는 어른이 되어간다. 



"할아버지든, 위우원 삼촌이든, 레이웨이든, 

사람이 죽을 때 마다 그 사람이 있던 세계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 없이 살아야만 한다.

원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더 애매하고, 차갑고, 

무관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내 다리는 얼어붙는다.

따뜻한 외투가 하나씩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류> P474




할아버지 예준린 세대와 손자 예치우성 세대는 이어진 듯하면서 너무나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중국 대륙 본토를 자기들 땅으로 여기는 구 세대와 대만인으로 살아가는 신 세대. 언제든 전우들과 함께 전쟁에 다시 뛰어들 준비가 된, 모제린 권총을 소중히 품은 구 세대와 군대를 폭력이 난무하는 부조리의 온상이라 혐오하는 신 세대.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결국 바다 같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토해내는 고통과 슬픔은 한낱 '물고기의 눈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저지른 죄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그땐 다 그랬어'라는 말로 잔인했던 과거를 외면하든지, 자신의 방식으로 속죄를 하며 살아가든지. 전쟁 상황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육했던 할아버지 예준린 역시 나름의 속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떤 신념도 없이 어쩌다 국민당으로, 어쩌다 공산당으로 편이 갈려 서로를 죽이게 된 사람들. 대만 태생의 일본인 작가는 소수의 신념, 소수의 이익에 의해 발생한 전쟁이 가져올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을, 중국 국공내전을 소재로 풀어내면서 전쟁의 가해자 역시 피해자일 수 있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하면 <반딧불의 묘> 때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책 속에는 레이웨이란 캐릭터로 살짝 언급되었지만, 대만이란 나라 자체가 참 '물고기의 눈물' 같기도 하다. 줄곧 다른 나라의 침략과 통치 속에 살아온,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자주적인 국민이 되어본 적이 없는 본성인들. 과거에는 노골적으로 핍박 받았고, 본성인들이 세운 민진당이 집권한 뒤 사정은 나아졌지만 이들은 여전히 왜 '하나의 중국' 속에 자신들도 포함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이들의 외침은 보이지 않을 만큼 무력하기만 하다. 



50년에 가까운 시간차가 있지만 잠시 살았던 타이베이의 골목 곳곳을 재현한 생생한 문장이 좋았다. 게다가 어두운 시절이라도 청춘은 반짝 빛나듯 유쾌한 문장도 웃음을 자아냈다. 할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에 대한 집요한 추격은 없지만,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긴장과 반전의 묘미 역시 뛰어났다. 



아쉬운 점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주인공을 어린 시절부터 보호해주던 걸크러시 마오마오, 똑똑한 편집자 고모 샤오메이, 모든 과거를 품고 아내가 된 시야메이링 모두 너무 부수적인 역할에 머물러, 남자 주인공 중심 서사의 한계가 보여서 안타깝다. 



하지만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답게 재미 면에서는 탁월했다. 유쾌하면서도 거대한 이야기를 담은 <상실의 시대>라고 해야할까? 소중한 것을 잃으며 어른이 되지만, 소중한 것들이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 인생은 그렇게 이어지는 거라고, 이 책의 마지막이 고독하기만 한 성장이 아니라 좋았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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