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는 죄가 없다 - 우리가 오해한 신화 속 여성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
나탈리 헤인즈 지음, 이현숙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신화는 그 자체에 여러 타임라인이 존재한다. 

즉, 신화가 만들어진 시간, 처음으로 전해진 시간, 그리고 그 이후 재창조되는 모든 시간이다. 

신화는 신비롭기도 하지만, 우리의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이야기를 선택할지, 어떤 인물을 내세울지, 

어떤 인물을 사라지게 할지는 화자와 독자 모두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잃거나 잊힌 여성들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토리텔링에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은 악당도, 희생자도, 아내도, 괴물도 아닌, 사람이다." -p9





어릴 적에 팜프파탈에 매혹된 적이 있다. 유디트, 메두사 같은 신화나 성경 속 여성에서부터 실존하는 마타하리까지.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들이 멋져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의 치명성은 남성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라는 불편한 사실을 깨닫는다.



<판도라는 죄가 없다>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둘러싼 오해를 풀고자 노력한 책이다. 저자 나탈리 헤인즈는 고전을 들려주는 방송인이면서 그리스 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다. 이런 이력 덕분에 저자는 우리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전해져오는 신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출처를 추적할 수 있었고, 그녀들을 왜곡하고, 그녀들의 진면모를 삭제한 부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파헤친다.




책 속에는 10명의 신화 속 여성들이 등장한다. 


판도라(상자를 열어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줬다는 그녀), 

이오카스테(오이디푸스 왕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그 왕비!), 

헬레네(트로이와 그리스 연합군이 피터지는 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원흉같은 그녀!), 

메두사(뱀머리를 가지고 모두를 돌로 만드는 악마 같은 여자), 

아마존 전사들(사내 아이들을 죽이는 야만적인 여자들), 

클리타임네스트라(불륜에 빠져 남편 아가멤논을 살했다는 여자), 

에우리디케(저승에서 남편 오르페우스가 그녀 땜에 뒤를 돌아본 바람에 그만..), 

파이드라(남편의 전처 아들을 사랑한 막장 그녀), 

메데이아(남편이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하려 하자 남편 독살 & 아들도 죽여버린 비정한 그여자), 

페넬로페(신화 속에서 가장 정숙한 여자로 알려진 그녀). 



한 명 한 명 그림 속에서든, 문학, 영화 속에서든 만나본 적이 있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에게 뒤집어씌워진 이미지는 남성작가들이 자신의 시대에 가진 여성상이나, 개인적으로 품은 여성 혐오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다수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아무래도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은 첫 장을 장식한 판도라였다. 이브와 함께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 불리는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어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뭔가 아둔한 여성상을 만들었던 것처럼, 호기심이 재앙을 불러왔다는 이미지를 남긴 여자가 바로 판도라다. 저자는 호기심이었든, 악의었든, 상자를 열어 하필 희망 빼고 모든 재앙을 다 불러왔다는 판도라를 변호한다. 사실 판도라가 연 것이 상자라는 것도 그리스식 큰 항아리를 번역하다 생긴 오류라고. 저자는 우리가 흔하게 떠올리는 판도라의 이미지는 비교적 근래에 예술가와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말한다. 로세티의 그림이나 호손이 쓴 단순화된 판도라의 이미지에 우리는 호기심에 넘어가버린 어리석은 여성 판도라 때문에 이 지긋지긋한 재앙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겨버리게 된 것이다. 



실제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엄청나게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판도라는 파르테온 신전에 모습을 새겼을만큼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게다가 그녀는 제우스가 인류에게 재앙을 주려는 의도로 내려보내진 것이지, 그녀 자신이 재앙을 부를 의도는 없었다는 것. 하지만 신화가 새롭게 재창조될 수록 제우스의 의도는 가려지고, 함께 공모해 진흙이었던 그녀를 아름답게 빚어낸 헤파이스토스와 그녀에게 '선물'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헤르메스는 자취를 감춘다. 저자는 판도라에게는 항아리를 열 동기조차 언급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류에게 재앙을 불러왔다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욕은 오직 판도라에게만 쏠릴 뿐이다. 이런 이미지는 여성혐오와 형제에 대한 불만을 가득 품고 있던 헤시오도스의 운문이 판도라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유명한 버전처럼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래에 작가들에 의해 판도라는 더욱 유혹에 넘어가버린 '이브'와 닮은, 그러나 더 큰 재앙을 초래한 여성으로 그려졌다.



한명 한명 그녀들이 왜 잘못된 프레임 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려주던 저자는, 하지만 너무 여성의 입장만을 옹호하려한 나머지 억지스러운 변호도 이어간다. 바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메데이아> 속 아주 극단적인 여자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그랬다. 메데이아는 내가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팜므파탈들을 모아둔 책에서도 만난 적이 있던 무서운 여자다. 바람 피운 남편을 독살하고 아들까지 죽였으니, 그 옛날 연극으로 이 이야기를 접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얼마나 공포에 질렸을까. 저자는 그녀가 아주 영리하고, 여성스럽고, 이국적이고, 마법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복수심에 불타 남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아들까지 죽인 여자가 어떻게 그런 존재일 수 있는가? 저자는 메데이아가 복수를 실행하는 동안 보여준 협상능력을 옹호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죽인 건 순전히 분노 때문이었다. 10년이나 전쟁으로 떨어져 있었던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에 비하면 서로 충분히 매혹을 느끼는 관계였던 메데이아와 이아손, 그러나 메데이아는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운 이아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처로 아이들을 죽이는 것을 택한다. 저자는 신화 속에서는 없던 메데이아의 유아살해를 에우리피데스가 창조해냈을 가능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설령 메데이아가 아이들을 죽였을지라도 그녀가 겪은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충분히 인간적인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치지 않고 침착하게 계획을 실행한 점을 높이 본다. 사실 메데이아에게 고유정을 떠올렸던 나는 도저히 이런 옹호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불편한 감정으로 읽어야했다.





아무튼 이 책은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신화 속 여성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아주 생생하게, 마치 연극을 함께 보고, 그녀들을 그린 그림을 함께 감상하는 듯 풍부한 묘사로 서술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이 원형들이 중간에 변형된채로 우리 곁에 어떻게 여전히 머물고 있는지 최근 영화와 드라마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어 대중문화에 대한 흥미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평면적인 모습은 그녀들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 그녀들에게도 입체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흥미로운 책이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