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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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출간되어 화제를 일으켰던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가 새로운 표지 '여우눈 에디션'으로 재출간됐다. 맑은 하늘에 내리는 이벤트 같은 비를 여우비라 하듯 무지개가 뜬 하늘에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걸 여우눈이라 하나보다. 출판사는 표지에 대해 '겨울에 내리는 눈송이는 손끝에서 금세 녹아버리지만 우리를 따뜻한 정서로 빠져들게' 한다고 소개한다. 정말 이 책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은 표지인 것 같다. 책을 읽고 있으면 추운 겨운 날씨에도 마음 안쪽에서 뜨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게다가 대단한 행운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 같은 '여우비'처럼 작가의 글은 '예사로운' 일상 속에 '깜짝 놀랄 빼어남'을 발견하는 일화들이 다채롭게 담겨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11년 전 타계한 박완서 작가가 남긴 산문들의 정수를 모은 에세이집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한국 문학을 꽤 많이 읽어왔다고 생각하는 나는 박완서 작가의 글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한창 한국문학을 읽어대던 대학교 때, 도대체 작품을 읽어는 보고 얘기한 건지 지금에 와서는 의심스럽지만 나에게 꽤 영향력을 끼치던 누군가의 혹평이 나에게 '박완서는 고루하다'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만들었다. 게다가 당시에 난 젊은 작가들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설정에 푹 빠져있던 터라 나이 많은 작가의 글은 별로 읽고 싶지 않았었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무지이자 멍청한 판단이었는지, 책 첫 장을 읽는 순간 대번에 깨달았다. 



남자들로 가득한 문학판에서 여성으로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름을 올리려면 얼마나 벼르고 벼른 글을 써내가야 할까, 얼마나 예리하게 독자들의 심금을 건드려야 할까. 박완서는 부족함이 없는 작가였다. 


일상에서 숱하게 일어나는 평범한 일들도 작가는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타인의 배려와 인정에 기꺼이 감동하고 세상 사는 맛을 즐기다가도, 영악한 자신을 못내 부끄러워하며 자기 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이 좀 더 선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는 작가의 정직한 글은 읽는 내내 마음을 콕콕 찔렀다.



특히 앉은뱅이 거지를 보며 그의 비참함에 마음이 쓰이다가도 그 뒤에 연결된 착취의 카르텔을 배불리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모질게 외면한 사연은 자주 적선하는 사람들의 불운을 애써 못본 척한 나를 비추는 듯했다. 작가가 느꼈던 소박한 인간성의 상실과 그로 인해 헐벗은 듯한 느낌이 그때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의 동요를 적확한 언어로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대범한 성격이다가도 자신이 타인에게 끼친 민폐를 미리 염려하며 몸과 마음을 사리는 소심한 면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지갑을 잃어버린 건지 두고 나온 건지 카드와 민증 없이 자신을 증명할 길이 없어 막막했던 에피소드에서 이미 유명세를 얻고 있던 시기에도 어쩌면 못나보일 수 있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 전원생활 에피소드들은 곳곳에 명랑한 노년을 보내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일제강점기에 나고 6.25를 겪은, 그야말로 남존여비가 당연한 세상 속에 살아온 작가지만 지금의 페미니스트 못지 않은 성평등한 시선도 놀랍다. 딸들에게 경제적 독립이 있는 삶을 강조했지만 막상 출산과 육아로 회사를 떠나야 할때 가정을 가진 여자가 일을 갖기 위해서 딴 여자를 하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낭패감'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가 아닌가. 




 



 



이 작품이 처음이라 몰랐지만 박완서 작가가 그간 써온 작품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체험적 진실'에서 출발해 천민자본주의, 가부장제 등 한국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 시대에 필요한 문제의식을 지닌 작품들이라고 한다. 이런 깨어있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작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작가의 어머니 영향이 컸다. 타인에게 좋은 점 하나는 꼭 발견하라는 가르침을 전한 현명함, 사랑 받은 기억만 남도록 해준 따뜻하고 넉넉한 품, 어떤 통증도 녹아 내리는 평화로운 입김. 우리는 이렇게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과 무한한 긍정의 마음으로 또 다른 사랑을 대물림하며 살아가는게 아닐까.  



미사어구가 범벅되지 않은 그야말로 정갈한 글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려한 작가의 소신처럼 글 속에서 마주한 나의 민낯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 진실이 마냥 무겁고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아리면서 새 살이 돋는 듯 간질간질하기도 했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해서일까. 게다가 이 할머니 왜 재밌기까지 한지, 이렇게 귀여운 노인으로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작가를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팬들은 물론이고, 나 같은 박완서의 세계에 첫 입문하는 사람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었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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