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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산모 수첩
야기 에미 지음, 윤지나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12월
평점 :

임신과 출산은 나의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박차고 남편을 따라 타 지역으로 이사를 와서 한창 일자리를 찾던 중 계획하지 않은 아이가 찾아왔고, 원치 않게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다. 서류 전형이 통과되어 필기시험을 앞두고 있던 공공기관은 코로나 상황에 시험을 보러 기차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친정 부모님이 격하게 만류했다. 스스로도 갓 입사한 직원이 출산 휴가 얘기부터 꺼내는 상황은 민폐일 거라는 생각에 구직활동을 꺼리게 되었다. 집에 콕 박힌 채 무료한 하루가 이어졌다.
임산부가 되자 전에는 받아보지 못한 배려에 둘러 싸였다. 불룩 튀어나온 배만 보고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들도 늘었다. 대개 비슷한 경험을 가진 중년 여성들이었고, 그들의 배려는 따듯했다. 하지만 나날이 달라지는 신체적 변화에 불편함이 앞섰다. 게다가 물리적 불편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나는 날개가 꺾인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임신 중인 시간이 나에겐 그나마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제 36회 다자이 오사무 상 수상작이라는 야기 에미의 <가짜 산모 수첩>을 읽다보니 나의 임신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소설은 직장인 시바타가 일상적인 차별에 빡쳐서 느닷없이 '위장 임신'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거래처 답례품 나눠주기, 냉장고에 썩은 음식 버리기, 누가 쓰다 갖다놓은 행주 빨기, 커피 타오기, 남이 먹은 커피잔 씻기 등 여직원이라는 이유로 자질구레한 일을 다 떠맡은 시바타. 담당 업무가 늘어가도, 밑에 신입 직원이 들어와도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아하는 잡무들은 팀 내 유일한 여자직원인 그녀의 담당이다. 어느날 시바타는 왜 이런 일을 자기가 해야하는 지 짜증이 솟구쳐서 충동적으로 임신을 했다는 핑계를 대며 빠져나온다. 그 후 시바타의 생활은 임산부에 대한 배려 속에 묘한 활기를 띤다. 상사 눈치를 보느라, 쓸데 없는 회의에 붙잡히느라 늘 야근을 해야했던 시바타는 오후 5시 정시에 퇴근하며 저녁의 여유로움을 만끽한다. 대충 도시락으로 때우던 끼니도 신선한 재료로 정성드려 만들어 먹고, 운동도 착실히 하며 오히려 전보다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책의 홍보문구가 꼬집듯 '여자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임신'을 역설적으로 택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문득 예전 회사에서 심의위원회 출석 같은 곤란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러 배가 남산만큼 나온 임산부 직원을 보낸다는 농담을 떠올리게 했다. 임신으로 마치 일상의 차별과 폭력에서 한발짝 빗겨난, 성역에 머무르는 것 같은 상황. 시바타 역시 '여자 역할'로 규정된 온갖 잡무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그녀를 대하는 태도들도 일순 달라졌다. 마치 성녀가 된 것처럼 무례하고 상스러웠던 남자 직원들의 행동이 제법 친절해진 것이다.
한편 시바타는 임산부 에어로빅 교실에서 만난 임산부들과 유대감을 쌓아간다. 남편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행복한 임신 생활을 이어가는 그녀들, 시바타 역시 남편이 있는 것처럼 거짓에 거짓을 더해간다. 그리고 자꾸만 거짓말이 쌓여 진짜 임신을 한 듯 자신의 몸도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시바타는 출산 후의 삶이 더 가혹한 지옥이라는 것을, 에어로빅 교실 동료 호시노를 통해 전해 듣는다. 아기를 제 몸으로 품었다는 이유로 부부가 공동으로 수행해야할 과업인 육아는 오롯이 여성의 몫이 된다. 남녀 모두 부모가 된다는 사실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남자에게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허용된다. 엄마는 지금 당장 울어대는 아기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밤낮을 모르는 아기를 돌보느라 잠을 줄여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다. 발 끝이 다 얼 것 같은 추운 날씨에 잠든 남편의 짜증을 받아내기 힘들어 우는 아기를 안고 거리를 배회하는 호시노의 모습에서 아기를 안고 혼자 눈물로 밤을 지새웠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육아휴직은 어떤가. 여자의 육아휴직이 디폴트라면, 남자는 여전히 보조적이다. 경력을 깎아가며 자신의 생을 육아에 헌신해야하는 건 여자에겐 당연하고, 남자에게는 고려해볼만한 옵션인 것. 그래서 아이의 육아를 위한 고민- 가령 어린이집을 보내거나, 어떤 방식으로 교육할지 등의 방향을 잡는 것 등-은 대체적으로 엄마의 몫이다. 오죽하면 자녀교육에 필요한 3가지 조건 중 하나가 엄마의 정보력이고 또 하나가 아빠의 무관심이겠는가.
제도적으로나, 인식적으로나 세상은 나아진 것 같지만 여성의 역할에 대한 관념은 공고하기 그지 없다. 마치 시바타가 다니고 있는 지관공장 속 '굳은 집념과 절실함'을 담은 채 한 치의 이탈도 없이 흘러가는 작업 공정을 보는 것처럼 흘러간다. 개별적인 여성이었을 때는 차별받고, 어머니가 되었을 때는 하나의 틀에 박힌 관념적 존재가 되는 여성의 삶. 어쩌면 임신은 그런 폭력과 차별 속에 잠시 벗어나는 유예기간 같은 것이 아닐까.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